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남동쪽에 있는 투메레모 마을. 이곳에 사는 조르지 페나 씨(20)는 외출할 때마다 주머니에 금을 넣고 다닌다. 금반지도 금팔찌도 아니다. 금을 잘게 쪼갠 금조각들이다. 이 지역에선 금이 화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법정 화폐인 볼리바르가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된 탓이다. 페나 씨는 “여기에선 볼리바르 대신 금으로 모든 거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건을 사면서 금을 주고받을 때마다 매번 무게를 잴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금 거래에 익숙해 대충 눈짐작으로 알 수 있어서다. 페나 씨는 “3개의 작은 조각이 있으면 0.125g 정도 되고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5달러 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블룸버그는 “전 세계가 100년 전 금에서 국가 화폐로 이미 통화체제를 전환했지만 베네수엘라에선 법정 화폐인 볼리바르의 신뢰가 떨어져 금이 다시 화폐로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금 외에 각 지역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것이 화폐 대용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투메레모 마을처럼 베네수엘라 남동부에선 금이 교환 매개체로 통용된다. 더 남쪽 지역으로 가면 브라질 헤알화가 지배적 통화 기능을 한다. 브라질과 국경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 접경지대인 서쪽 지역에선 콜롬비아의 페소화가 중심 화폐 역할을 한다. 콜롬비아 리서치 회사인 에코아날리티카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서쪽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산크리스토발에선 전체 거래의 90% 이상이 페소로 이뤄진다. 이에 비해 카라카스 같은 대도시에선 미국 달러가 주요 통화 위상을 가지고 있다. 블룸버그는 “유로화와 암호화폐도 일부 지역에서 틈새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원유 매장량 기준 세계 1위였던 베네수엘라의 경제 규모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세계 경제 전망에 제시된 베네수엘라의 2019년 경제성장률은 -35%, 물가상승률은 1만9906%였다. 2018년 물가상승률은 6만5374%였다.
중남미에서 비교적 구하기 쉬운 커피 가격도 베네수엘라에선 최근 1년간 1737% 올랐다. 이런 숫자를 공개한 뒤의 후폭풍이 두려워 베네수엘라 정부는 수년 전부터 공식적인 물가상승률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자 베네수엘라는 화폐 개혁을 추진했다. 지난 1일 3년 만에 또다시 ‘100만 대 1’의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을 단행했다. 볼리바르 화폐 가치가 100만분의 1로 급감했다는 얘기다. 2008년 ‘1000대 1’, 2018년 ‘10만 대 1’의 화폐 개혁에 이어 세 번째였다.
그래도 볼리바르의 위상은 여전히 추락하고 있다. 리서치 업체인 다타날리시스의 루이스 레온 대표는 “볼리바르가 부의 저장이나 교환 수단으로서 전혀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국민은 볼리바르 외에 다른 통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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