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중동 지역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업이었다. 하지만 교역에서의 위상은 달랐다. 농산물은 대부분 자가소비용이었다. 농산물은 상하기 쉬웠고 부피는 컸으며, 이윤은 적어 장거리 교역에 적합하지 않았다. 교역품목에서 중동지역을 대표한 것은 직물(textile)이었다. 당시 중동산 직물이 유럽에 대량 수출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주요 직물제품 명칭은 중동 지방의 주요 도시명에서 나왔다. 모술에서 모슬린(muslin)이, 다마스쿠스에서 다마스크(damask)가 유래했다. 직물 관련 용어들에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은 남아 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거즈(gauze)는 아랍어 ‘qazz’에서 나왔다. 앙고라 산양에서 채취한 모섬유 모헤어(mohair)는 ‘mukhayyar’라는 아랍어 단어에서 출발했다. 치밀한 조직의 평직물을 가리키는 ‘태피터(taffieta)’ 같은 전문용어도 페르시아어 ‘taftah’가 근원이다.
알레포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슬람권 주요 교역항에선 인디고나 실크 등 주요 직물업 관련 최신 정보를 발 빠르게 다뤘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에도 직물 관련 최적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정보전을 진행했다. 이슬람 상인들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멕시코산 코치닐 염료를 구입하는 식의 활동을 한 것이다. 알레포에 거점을 둔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영국 레반트코사의 면직물 목도리 제품을 대거 비축했다가 페르시아나 러시아뿐 아니라 티베트와 카슈미르까지 가서 판매할 정도로 활동 범위가 넓었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중요한 직물 제품은 ‘티라즈(tiraz)’라고 불린 고급 무늬가 들어간 자수옷감 산업이었다. 최고위층용 사치품이었던 티라즈 제작은 국가 독점으로 진행됐다. 티라즈 공방은 국영이었고 자수무늬를 넣는 일꾼들도 국가 소유였다.
실크(비단)는 초기부터 금, 보석, 상아, 진주, 향신료, 태피스트리 등과 함께 부피는 작게 나가면서 부가가치는 큰 귀중품 교역의 핵심 품목이었다. 경제적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 무게도 대단했다. 로마제국과 비잔티움제국, 페르시아제국을 비롯해 이슬람교가 퍼진 이후 들어선 주요 왕조들이 모두 국가가 실크 교역을 독점했다. 실크를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실크 제작도 모두 국가 독점으로 진행됐다.
주요 사치성 교역품목에는 각종 향 제품과 후추 같은 향신료가 포함됐다. 중세에 후추 교역은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인도 산지에서 후추 1g이 1~2g의 은과 교환됐지만 알렉산드리아나 알레포에 이르면 은 10~14g의 가치로 껑충 뛰었다. 베네치아에서 후추 1g은 은 14~18g으로 교환됐고 독일에선 은 20~30g을 줘야 후추 1g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밖에 보석과 상아, 희귀 목재 등도 주요 교역품목에 이름을 올렸다. 후대로 가면 커피와 차, 아편, 도자기도 주요 교역품목이 된다.
노예의 주요 공급지는 동유럽과 유라시아, 스텝, 아프리카였다. 때로 인도와 중국 등에서도 소수지만 노예가 수입됐다. 영어에서 노예를 뜻하는 ‘slave’의 어원이 된 슬라브인들은 서유럽 노예상을 거쳐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에게 팔렸다. 동유럽에선 오스만제국의 영역이 발칸반도까지 넓어지면서 중간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슬라브족 노예가 곧바로 충원됐다. 17세기까지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을 통해 유럽인들도 이슬람 세계에 노예로 팔려갔다. 때론 바르바리 해적이 장거리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1627년 이들은 아이슬란드까지 가서 포로 242명을 붙잡아 알제리 시장에 팔았다. 1631년 6월 20일엔 아일랜드 볼티모어에서 바르바리 해적이 출몰해 107명을 잡아간 뒤 다른 곳에서 포획한 47명을 더해 이슬람권 시장에 팔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중앙아시아에선 유목민들이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의 마을에서 주민을 잡아가 노예시장에 내놨다. 이를 두고 ‘스텝(유목인)의 수확(the harvest of the steppes)’이라 불렀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② 이슬람교가 초기에는 개방적이었지만 갈수록 배타적이 되거나 테러집단인 것처럼 비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③ 중세 유럽의 농노와 이슬람의 노예, 고려시대의 노비는 각각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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