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경(1940~1985)은 45년의 짧은 삶을 통해 한국 추상미술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성화가다. 20여 년의 활동 기간에 5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수용한 미국적인 화가 또는 요절한 비극적 여성 작가 정도로 알려졌던 그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6월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최욱경 개인전이 열렸고, 올해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세계적인 여성 추상미술가들을 소개하는 전시에 작품이 출품돼 비중 있게 다뤄졌다.
최욱경의 대표작을 폭넓게 만날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가 27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막을 올렸다. 1953년부터 작고할 때까지의 작품 및 자료 200여 점을 내년 2월 13일까지 보여주는 전시다.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 2과장은 “미술 교육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최욱경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이 문학과 만나는 다층적인 지점들에 주목해 그의 작업 전반을 새롭게 읽어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태생인 최욱경은 마치 그림을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열 살 때부터 김기창·박래현 부부의 화실에 다녔고, 이화여중과 서울예고 시절엔 김흥수와 장운상, 김흥수, 정창섭 등 당대 최고 화가들에게 배웠다. 서울대 회화과 재학 중 한국미술가협회전 국무총리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졸업 다음 해인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3년 동안은 추상표현주의와 후기회화적 추상, 팝아트와 네오 다다이즘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미국 현대미술을 폭넓게 공부했다. 1965년에는 ‘앨리스, 기억의 파편’이란 작품을 통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관한 관심을 처음 구체화했다. 책 출간 10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도 떠들썩하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가 언어와 문화가 모두 낯선 미국 유학 경험을 ‘뿌리가 흔들리는 충격’이라고 표현했던 만큼, 원더랜드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뒤바뀌는 혼란을 겪은 앨리스의 이야기가 쉽게 공감이 됐을 거란 설명이다.
1976~1977년 미국 뉴멕시코의 로스웰미술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경험은 최욱경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1977년 작품 ‘줄타기’처럼 강렬한 색채와 생명감이 돋보이는 대작이 이 시기에 제작됐다. 줄타기는 태양을 닮은 붉은 원을 배경으로 꽃과 산, 새와 동물을 연상시키는 유기적 형태들이 뒤얽혀 있는 작품이다. 강 과장은 “광활한 대지와 모래사막, 진귀한 야생동물이 공존했던 뉴멕시코의 이국적 풍경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초현실적인 꿈속 풍경이 뒤섞이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한국과 미국, 현실과 꿈속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사이의 공간’에서 그만의 독자적인 추상미술이 탄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9년 귀국해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는 경상도 지역 산들의 능선, 거제도 등 남해의 섬, 물 빛에서 얻은 감동, 태양 광선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색채 유희 등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이 1980년대 들어 중간색을 주로 쓰고, 조형적으로 절제된 선과 구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뀐 계기가 됐다. 이때의 주요 작품이 ‘경산 산’(1981)과 ‘섬들처럼 떠 있는 산들’(1984) 등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작품세계 변천을 세 시기로 나눠 보여준다. 그의 작업 세계를 보다 다각적으로 볼 수 있는 자화상과 기록물 등도 소개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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