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동네에서 누구나 검객 노릇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만화책에서 한 번쯤 봤던 기술 이름을 외치며 상대에게 달려가본 기억들. 칼싸움에 대한 로망은 유전자 어딘가에 각인돼 있을지 모른다.
펜싱은 칼싸움에 대한 근원적 욕구를 가장 직접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스포츠다. 펜싱클럽을 찾는 사람의 상당수는 배우려는 동기로 “칼싸움을 해보고 싶어서”를 첫손에 꼽는다. 부모님을 졸라 온 초등학생이나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직장인이나 목적은 같다.
펜싱은 서양의 검술, 더 구체적으로 프랑스의 검술에 기원을 두고 있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전투에 나섰던 중세 유럽만 해도 갑옷을 파괴할 수 있는 대검 등 중병기가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화약의 발달로 창과 칼을 막기 위한 무거운 갑옷이 무력해졌다. 전투 양상이 바뀌면서 검도 가벼워졌다. 펜싱에서 쓰는 검과 비슷한 ‘레이피어’가 등장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검술이 연구됐다.
프랑스의 검술 사범 앙리 드 생크 디디에가 제안한 긴 칼과 빠른 몸놀림을 활용한 찌르기 위주의 검술이 주류가 되면서 플뢰레를 비롯한 종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럽 여러 나라가 경쟁을 벌인 끝에 프랑스가 종주국 자리를 차지했다. 펜싱 용어가 전부 프랑스어로 이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칼싸움에 대한 로망을 제쳐놓더라도 펜싱은 매력적인 스포츠다. 펜싱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끊임없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전신 운동이다. 심폐지구력은 물론 근력도 키울 수 있다. 치밀한 두뇌싸움도 필수적이다. 몸을 움직이면서 공격과 수비 전략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몇 개의 수(手)를 갖고 있는지가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펜싱은 대표적인 엘리트 스포츠 종목이었다. 저변이 넓지 않았고 ‘귀족 스포츠’라는 심리적 장벽도 있었다. 하지만 202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펜싱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펜싱학원과 클럽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펜싱 대표팀 ‘어펜저스’를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직접 피스트(경기판)에 올라 검을 휘둘러보면 어떨까. “앙 가르드! 프레? 알레!(En garde, pret, allez·기본 자세, 준비, 시작)”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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