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자산 가치가 하락하고, 이에 따라 금융 시스템이 부실해지면서 시작되는 금융위기를 의미한다. 미국 경제학자인 하이먼 민스키가 처음 창안했을 때만 해도 큰 관심을 못 받았지만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양상을 예언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널리 알려지게 된 개념이다.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로 탄소 중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관련 움직임이 민스키 모멘트를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탄소 중립을 위한 기업들의 움직임에 각종 부채 및 회계 평가 시스템 변화가 더해지며 에너지 기업은 물론 국가 신용등급까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가정에 가정이 거듭된 먼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에너지 부족 문제 중 하나로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화석원료 투자 감소가 꼽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관련 문제는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문제는 각국 정부의 탄소 중립 정책 시행 과정에서 이들 기업들의 자산 상당 부분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화석연료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며 관련 생산·저장시설의 가치가 급감하는 것이다. 철강 및 석유화학 기업들은 탄소세 부과 등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수요 감소를 동시에 겪을 수 있다.
물론 관련 기업들의 주식 하락에 따른 충격은 태양광 발전 기자재 업체 등 다른 기업들의 반사이익을 통해 상쇄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탄소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세계 주식시장 전체 시총의 4분의 1에 이른다.
이코노미스트지가 다음과 같이 우려하는 이유다.
"서브프라임을 촉발한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가치가 1조달러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고탄소 기업 자산이 일부만 줄어들더라도 예상 이상의 충격을 줄 수 있다. 만약 대형 은행이나 보험 사업자가 관련 자산의 상당 부분을 갖고 있을 경우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탄소 그림자 가격은 신설되는 생산설비 및 인프라가 건설 이후 배출할 탄소까지 비용에 반영해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 골자다. 지금까지는 화력발전소을 새로 지을 때 토지매입비와 건설비 등 직접적인 비용만 건설비로 잡았다면, 그림자 비용에는 해당 발전소가 존속할 기간동안 매년 배출할 탄소에도 가격을 매겨 비용을 산출하는 것이다.
탄소 가격을 어떻게 책정하느냐에 따라 고탄소 배출 시설 및 인프라는 상당 부분 건립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림자 비용이 반영된 건설비가 시설 건설에 따른 효용을 뛰어넘게 되기 때문이다. EBRD는 이미 자체 투자 프로젝트와 관련해 그림자 비용을 반영하고 있으며 관련 논의는 세계은행, 국제금융센터(IFC)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와 유럽중앙은행(ECB)를 비롯해 89개 중앙은행과 감독당국으로 구성된 '금융시스템의 녹색화 네트워크'에서도 관련 내용의 논의되고 있다. "탄소 배출 1t당 150달러의 그림자 비용을 부과해야 2050년 탄소중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서도 제출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탄소 그림자 비용이 도입되면 고탄소 산업은 사업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도 외부에서 조달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관련 자산가치를 빠르게 떨어뜨리는 또하나의 민스키 모멘트를 촉발할 요인이다.
올해초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에 따르면 108개국 중 63개국이 탄소 배출 감축 과정에서 신용등급 하락을 경험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에너제 생산이 많은 러시아와 호주의 관련 손실이 클 것으로 전망됐다. AAA등급 평가를 받고 있는 호주 국채는 2030년까지 한 단계, 2100년에는 네 단계 신용등급이 떨어질 전망이다.
개발도상국들도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은 이미 탄소 배출을 줄여오고 있지만 개도국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탄소 배출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3대 신용평가사는 관련 리스크를 국가 신용등급에 반영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피치와 무디스는 기후 변화 리스크가 등급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기 위한 ESG 점수를 개발했다. S&P 역시 탄소 배출 영향을 신용에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림자 비용은 물론, 탄소 저감 비용의 국가 신용 등급 반영은 개발도상국일수록 불리하다. 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 육성 비용이 크게 불어나기 때문이다. 석탄화력 발전을 선택하지 못하게 되면서 현대 경제에 가장 중요한 원천인 전기 생산비가 올라간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이같은 조건 하에서는 선진국이 100~200년 전에 밟아온 산업입국의 길이 후발국들에 항구적으로 막힐 수 있다.
토지와 노동력 등 생산 관련 주요 요소가 실제로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비용인 것에 반해, 탄소 배출과 관련된 비용은 어디까지나 선진국이 책정한 가공의 비용이다. 선진국이 기준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물질적 비용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고, 탄소 배출에 따른 문제는 개도국 입장에서는 추상적이다.
경제 성장이 급한 개도국 입장에서 탄소중립과 관련된 선진국의 각종 정책이 부당해 보일 수 있는 이유다. 자신들의 기준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18~19세기 열강들이 전함을 몰고와 통상조약 체결 등을 강요했던 '포함외교'와 비슷하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탄소중립의 승패가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한 개도국의 저감 노력에 달렸다는 점은 19세기와 다르다. 완력이 아니라 설득으로 가능한 목표인 것이다. 결국 경제력이 취약한 개도국의 탄소저감 비용을 선진국이 얼마나 나눠 부담하는가가 중요하다.
COP26에서는 해당 사안도 비중 있게 논의된다.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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