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폐는 네 종류다. 별 불편 없이 쓰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그 종류가 좀 적은 것 같다. 미국은 7종의 지폐가 유통되고 있다. 더 이상 발행되지 않는 고액권까지 합하면 12종이다. 유럽연합(EU)도 7종이나 된다. 종류가 많으니 지폐에 인쇄된 인물과 상징물, 얽힌 스토리도 다양하다. 각자 주머니 사정이나 취향에 따라 같은 금액을 다양하게 지불하는 것은 덤이다.
내 지갑에도 행운을 바라는 마음으로 고이 한 장 간직돼 있는 2달러짜리 지폐는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선물로 받은 후 모나코 왕비가 된 일을 계기로 행운의 상징이 됐다. 반면, 20달러짜리 지폐의 주인공으로 제2차 미영전쟁의 영웅이자 제7대 미국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은 노예제 옹호 전력으로 흑인 여성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에게 자리를 내어줄 처지가 됐다. 100달러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쇄공 출신의 정치인이나 미국인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잘못 기억하고, 다른 나라에선 그를 세계에서 가장 힘센 할아버지로 부른다.
일본은 2000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맞춰 2000엔권 지폐를 발행했다. 소비 증진 목적이 있었지만 지폐 앞면에 인물이 아닌 사물(오키나와 슈리성의 슈레이문)을 도안으로 사용한 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단위 액면권을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돈은 본연의 가치가 경제적 기능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추구하는 가치를 공간(격지)과 시간(후대)을 넘어 서로 공유하는 역할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지폐 4종의 다양성이 부족한 점이 다소 아쉽다.
만약 2000, 2만, 10만원권을 추가하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다양한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을 새길 수도 있고, 우리의 자랑거리인 반도체, 바이오, 2차전지도 담아볼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로 한발짝 다가서는 데 돈의 다양성은 꽤 흥미로운 접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1970년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세계 최초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지폐를 들고 영국에 가서 배를 건조할 차관을 얻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이렇듯 새로운 돈(money)이 또 다른 돈(wealth)을 불러올 스토리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현금 없는 사회가 가까워지고 한국은행이 디지털화폐 발행을 검토한다는데, 비용도 많이 드는 화폐권종 다양화라니?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계에 그리고 후대에 전하고 싶은 우리의 다양한 메시지를 돈에 새길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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