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폰' 소형화의 주역, 日 무라타 사장 이야기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1-11-02 07:32   수정 2021-11-02 10:04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세계 1위 무라타제작소는 작년 3월 세상을 놀래키는 인사를 발표했다. 나카지마 노리오 전무(사진)를 제4대 사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1950년 창업한 무라타는 창업자인 무라타 아키라와 장남 무라타 야스타카, 3남 무라타 쓰네오등 부자가 초대부터 3대째 사장을 맡았다. 창업 70년만에 처음으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가족경영 접고 엔지니어 사장 선임
무라타가 왜 경영체제의 전면 개편을 결정했는지, 무라타 집안은 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세계 최강 부품 기업의 경영권을 맡긴 것인지는 나카지마 사장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나카지마 사장은 오사카 출신으로 교토의 사립대학인 도시샤대 공대를 졸업했다. 전임 회장인 무라타 쓰네오의 도시샤대 후배다.

1985년 무라타에 입사한 이래 줄곧 기술직에서 한우물만 팠다. 입사 후 처음 맡은 업무는 무라타의 주력상품인 MLCC의 원료를 개량하는 일이었다. MLCC의 재료로 값이 싼 니켈을 써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나카지마 사장은 이를 위해 필요한 기술개발에 몰두한다.

그는 한 언론인터뷰에서 "본사 도서관의 전문서는 전부 읽었다. 인생에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한 시기"라고 밝힐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도 '이거다' 하는 성과가 거의 없었다"라는게 나카지마 사장의 회고다.

1991년 나카지마는 프랑스 전자부품 회사로 파견을 갔다. 여기서는 무라타의 주특기인 MLCC 기술을 고주파 통신부품에 적용할 수 있는 지를 2년에 걸쳐 연구한다. 이번에도 생각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유럽법인 사장이었던 무라타 쓰네오 회장이 '언제까지 놀고 있을건가'라고 놀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지마의 잠재력을 알아본 무라타는 계속해서 중책을 맡긴다.
◆핸드폰 소형화의 주역
1990년대 후반 마침내 나카지마 사장의 잠재력이 꽃을 피운다. 핸드폰의 송수신 전파를 바꾸는데는 '스위치 플렉서'라는 부품이 사용된다. 스위치 플렉서의 개발 덕분에 '벽돌폰'으로 불리던 핸드폰 사이즈가 손바닥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할 수 있었다. 스위치 플렉서를 개발한 인물이 나카지마 사장이다.

1996년 당시 세계 최강의 휴대전화 메이커인 스웨덴 에릭손의 기술 책임자가 무라타를 방문한다. 야키도리집 회식에서 에릭손 책임자는 신기술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통신부품을 훨씬 작게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한다. 이를 뜯어보던 나카지마 사장은 그 자리에서 리포트용지에 새 회로도를 그리며 "이렇게 바꾸면 더 작게 만들수 있다"라고 응수한다. 벽돌폰이 내손안의 작은세상이 된 순간이다. 현재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스위치플렉서는 훨씬 진화했지만 여전히 나카지마가 야키도리집에서 그린 회로도의 기본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지난해 1조6302억엔에 달했던 무라타 매출 가운데 49.5%인 8049억엔이 통신에서 나왔다. 사내에서 나카지마 사장을 "무라타를 스마트폰 부품 메이커의 대표격으로 키운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다.

나카지마를 또 한번 유명하게 한 에피소드가 있다. 2000년대 한 고객회사가 휴대용 MP3 플레이어에 들어갈 만큼 작은 통신기기를 개발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카지마 사장은 "MP3플레이어에 통신기기를 달아서 뭘한담?"이라고 의아해하면서도 고객의 요청에 응했다. 애플이 무라타의 고객이 된 계기다. 이런 에피소드들 때문에 작년 3월 무라타가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언하기 이전부터 사내외에서는 누구나 나카지마 사장을 예상했다고 한다.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결정"
지난해 미국의 수출규제로 핸드폰 세계 1~2위를 다투던 화웨이의 시장 점유율이 5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화웨이의 몰락을 무라타의 위기로 진단했다. 통신 부품이 무라타 전체 매출의 49.5%를 차지하는 한편 매출의 58.4%는 중국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 통신업체인 화웨이가 떨어져 나갔으니 무라타 매출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나카지마 사장은 올초 기자회견에서 "스마트폰 메이커의 점유율이 바뀌어도 부품업체의 입장에서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애플과 삼성전자 등 기존 고객에 화웨이의 점유율을 빼앗으며 새롭게 떠오르는 업체에 납품하면 무라타의 매출에는 타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라타가 5G 등 고급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초소형, 고용량 제품을 사실상 독점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 한곳 한곳과 거래하는게 아니라 휴대폰 시장 전체와 거래하는 회사가 되다보니 화웨이 같은 개별 기업의 몰락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나카지마 사장의 장담대로 무라타의 통신부문 매출은 2분기 소폭 줄었다가 3분기는 5% 증가했다.

나카지마 사장은 지난 10월7일 교토의 무라타제작소 본사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갖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5G 이동통신과 자율주행차, 전기차 등 전자산업에서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변화가 10년 사이 일어났다.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속도와 투명성을 중시하려는 결정으로 이해한다."

엔지니어 출신 최고경영자(CEO)의 장점은 "내년이나 3년후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만 10~20년 뒤의 기술혁신 조류는 예상이 가능하다. 엔지니어 출신 경영인은 'A기술은 개발에만 10년이 걸리니 지금부터 준비하자'하는 식으로 기술 이해도 부분에서 좀 더 능숙하다."고 말했다.
◆무라타 M&A 전략 '니지미다시'
'니지미다시(にじみ出し·'스며듦'이라는 뜻)'로 불리는 무라타의 기업 인수·합병(M&A) 전략도 주목을 받고 있다. 무라타가 매년 안정적으로 실적을 늘려가는 비결 가운데 하나로 독특한 M&A 전략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니지미다시 전략은 매년 이익을 내면서 쌓은 풍부한 사내유보금을 바탕으로 무라타가 벌이는 사업과 관련이 있는 영역에서 조금씩 사세를 확대하는 전략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M&A를 규모가 큰 기업을 인수해 전세를 단숨에 뒤집거나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데 활용한다.

반면 무라타의 M&A는 큰 화제거리가 되지 못한다.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깜짝 딜 대신 조그마한 회사에 조금씩 지분투자를 하는 방식의 M&A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해당 분야의 점유율이 높거나 기술력이 있는 기업과 먼저 제휴하고, 무라타의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확인한 후 경영권을 인수한다.

무라타는 최근 이어폰 등 웨어러블 단말기용 전고체 배터리 시장에 진출했다. 내년 3월부터 월 10만개씩 양산할 계획이다. 전고체 배터리 기술이 없던 무라타가 웨어러블 단말기용 전고체 배터리 시장에 진출하는 과정에 니지미다시 전략이 잘 나타난다.

무라타는 2017년 소니의 배터리사업부를 인수했다. 소니의 배터리사업부는 1991년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한 전통의 강자다. 주도권을 한국의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중국의 CATL 등에 빼앗겼지만 무라타에 인수된 이후 재기를 꿈꾸고 있다.

무라타가 배터리 사업에 진출한 건 주력사업인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통해 쌓은 적층기술을 배터리에 접목하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특기인 소형화와 대용량화를 살려 소형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성공한 덕분에 웨어러블 단말기에 납품할수 있게 됐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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