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성곽 안의 법조인들

입력 2021-11-03 17:23   수정 2021-11-04 00:16

‘화천대유 사태’에 연루된 권순일 전 대법관에 대해 법조계 인사들이 얘기하는 걸 듣다 보면 의아할 때가 많다.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다”(이균용 대전고등법원장, 10월 8일 국회 국정감사) 정도면 굉장히 강한 비판이다.

대개 “명판결을 내놓은 훌륭한 판사였다”며 과거 행적으로 화제를 돌리기 일쑤다. “그분이 그럴 리 없다”거나 “의도를 갖고 거액을 받은 게 법정에서 확인되면 충격이 클 것”이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권 전 대법관이 지난해 대법관 퇴임 후 10개월간 화천대유로부터 매달 1500만원의 고문료를 받은 건 확인된 사실이다. ‘김만배 전 머니투데이 부국장 부탁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유리한 판결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강하게 받고 있다.
대장동 '협작'에서 드러난 민낯
법조인 특유의 신중함이 작용한 때문이라면 할 말은 없다. 당사자인 권 전 대법관이 입을 꾹 닫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보통사람들과 너무 다른 반응에 ‘높은 성곽 안에 살면서 그들만의 윤리가 고착된 것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경제적 공동체’라는 희한한 법리까지 개발해 위정자·기업인을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들이 동료에게는 유독 관대해 더 그렇다.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2019년 임명되는 과정에서 이 재판관 부부의 주식 투자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비슷했다. 이 재판관 남편인 변호사 A씨는 판사 시절 자신이 재판했던 회사 주식에 거액을 투자하는 이해상충을 일으키고도 “왜 잘못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항변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경우 자신이 분석을 담당하는 업종에 속한 종목 투자는 완전히 금지된 실정이다. 회계사는 소속 법인이 감사하는 자산운용사의 펀드에도 투자하면 안 된다. 금융업계에선 누구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왜 잘못인지 모르겠다”고 강변한 것이다.

이렇게 딴 세상 살고 있는 듯한 법조인 특유의 감각은 대체 그 연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송사에 휘말린 사람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만큼 자연스럽게 일종의 선민의식이 생긴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요즘같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해야 할 타당성이 상당하다” 같은 어색한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쇄신 안하면 한순간에 무너져
하긴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도 인간을 재판하던 존재는 신(神)들이었다. 법조인의 선민의식이란 게 동서고금을 막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천대유 사태의 순기능이 있다면, 물밑에서 벌어지던 ‘자칭 기업인’과 전직 판검사 등 ‘높은 분’들의 협잡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점일 것이다. 모두가 민낯을 보게 됐으니 아무리 성곽을 높이 쌓았어도 허물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글로벌 에너지업계의 ‘슈퍼 메이저’ 소리를 듣는 엑슨모빌은 1989년 ‘발데즈호’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해 사과를 거부하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그 결과는 25억달러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2008년)이었다. 더 치명적인 건 ‘환경을 파괴하는 나쁜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엑슨모빌 정도 되니 망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남양유업은 2013년 불거진 대리점 갑질 사태의 여파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경영권이 뒤바뀔지 모르는 처지에 놓였다.

‘법조’라고 다를까. 상당수 구성원이 위기 징후조차 느끼지 못하는 터다. 뼈를 깎는 쇄신이 없다면 ‘위기관리 실패 교과서’에 실릴 선례들을 따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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