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壁)! / 반만 마신 찻잔에서는 김도 오르지 않고 재떨이에는 꽁초만 그득하니 벌써 두 시간이 되었는지 세 시간이 되었는지, 그 두 시간 혹은 세 시간을 벽 밑의 세트에 가서 그린 듯 붙박이로 앉아 있는 포즈가 왜 아니 그림 같을꼬! 벽화란 참으로 천금 값이 나가는 한마디다.
또 특히 온종일 다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물만 먹는대서 금붕어라고도 한다. 역시 재치꾼이 아니고는 지어내기 어려운 명담(名談)이다.
이렇듯 다방인종이 일부 사람에게 (가령 독한 가시는 없으나마) 조롱을 받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나 그러한 조롱을 때우고도 넉넉 남음이 있을 만큼 다방은 전당국과 아울러 현대인에게 다시없이 고마운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머리와 몸이 피로하기 쉬운 우리 도시이다.(중략) / 아무튼지 피로를 느낄 때 길옆 거기 어디 다방을 찾아 들어서면 … 자리가 편안하겠다, 마시는 것이 흥분제였다, 음악이 아름답겠다, 차를 마신 다음에는 담배라도 붙여 물고 유유히 20, 30분이고 앉아 있노라면 피로는 자연 걷혀진다.(중략)
도시에 살자니 펀둥펀둥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고는 제각기 제 깜냥에 자작소롬한 용무가 많고, 자주 사람을 만나야 한다. / 그것을 일일이 찾아다니고 제집에서 기다려서 만나 보고 하자면 여간만 불편한 게 아니다. / 한데 다방이면 으레 중심 지대에 있겠다, 항용 다른 볼일과 겸서서 나올 수도 있고 지날 길에 잠시 들를 수도 있다. 더구나 전화가 있으니 편리하다. 웬만한 회담이면 그러므로 안성맞춤인 것이 다방이다.
가령 의식적으로 피로를 쉰다거나 더욱이 다방을 사랑방으로 이용하는 그런 공리적인 타산은 말고라도, 혹시 겨울의 모진 추위에 몸을 웅숭크리고 아스팔트 위로 종종걸음을 치다가 문득 눈에 띄는 대로 노방의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간다고 하자. 활짝 단 가스난로 가까이 푸근한 쿠션에 걸어앉아 잘 끓은 커피 한 잔을 따끈하게 마시면서 아무 것이고 그때 마침 건 명곡 한 곡조를 듣는 안일과 그 맛이란 역시 도회인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낙인 것이요, 그것을 모르고 도시에 살다니 그는 분명 촌맹(村氓)이며, 가련한 전 세기 사람일 것이다.
- 채만식, 《다방찬》 -
철수 샘이 좋은 문학 작품으로 꼽을 때 기준은 뭐니 뭐니 해도 ‘참신한 생각’이다. 남들과 다른 시각! 작가라면 남들이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것이 철수 샘의 신조다. 호불호(好不好)! 어떤 대상이 어떤 사람에게는 좋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에 반대로 말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닌데, 용기를 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철수 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작가의 글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 수필은 철수 샘도 기꺼이 출제하고 싶은 작품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다방인종’이 ‘조롱을 받’는 상황에서 ‘다방’을 ‘고마운 물건’이라고 하는 작가의 참신한 생각 때문이다. 또한 제목에 ‘찬(讚, 인물이나 사물을 기리어 칭찬하는 글)’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다방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작가의 용기도 멋지다. 지문에는 없는 이 수필의 뒷부분은 언뜻 보면 ‘다방인종’을 못마땅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다방 문화를 해치는 사람들을 꾸짖음과 좋은 다방 문화를 위한 애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중요하지 않지만 ‘다방’과 함께 ‘고마운 물건’으로 언급된 것이 ‘전당국(典當局)’이다. 이는 물건을 잡고 돈을 빌려주어 이익을 취하는 곳으로, 흔히 사람들에게 탐욕과 가난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그런 곳을 ‘고마운 물건’이라고 하니 작가의 독특한 생각이 어떠한지 궁금함을 감출 수 없다. 이런 작품은 수능에서 많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촌맹(村氓)’은 시골에 사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다방’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낮게 평가된 사람으로 사용되었다. ‘전 세기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쓰였는데, 아예 ‘가련한’ 사람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대상을 평가하는 데 이용되는 어휘들은 의미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주는 느낌까지 고려하며 음미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두레’는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부락이나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을 말하는데, 이 뜻은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둘레’를 잘못 썼거나 어느 지명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첨구거사’는 원문에 ‘尖口居士’라 되어 있어 그 뜻을 짐작해볼 수 있다. ‘첨구’는 뾰족하고 거친 입을 말하고, ‘거사’는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를 이르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지내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니, 아무래도 ‘첨구거사’는 말을 거칠하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성 싶다.
‘다방인종’은 ‘인종(人種, 인류를 지역과 신체적 특성에 따라 구분한 종류, 사람의 씨)’라는 말을 고려할 때, 다방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자작소롬한’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고, ‘겸서서’는 ‘겸하여(두 가지 이상의 기능을 함께 지녀)’와 같은 말이라 생각된다.
이런 말들은 문맥이나 어휘 구조를 고려해 그 뜻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명담(名談)’은 한자 그대로 사리에 꼭 맞게 뜻이 깊고 멋있는 말을 말하고, ‘깜냥’은 스스로 일을 헤아림 또는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항용(恒用)’은 흔히 늘이라는 뜻의 부사이고, ‘공리적인 타산’은 이익과 행복을 증진하는 것을 기준으로 대상을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노방(路傍)’은 길의 양쪽 가장자리를 뜻한다. 이 어휘들은 고등학생이라면 사전에서 찾아 그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② 참신한 생각, 남다른 생각을 드러낸 글들이 수능 국어에 많이 출제됨을 알아 두자.
③ 원래는 좋고 나쁨의 뜻이 없는 어휘인데, 사람들이 그 감정들을 어휘에 담아 사용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 두자.
④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어휘들은 문맥이나 어휘 구조를 고려해 그 뜻을 짐작하도록 노력하자.
⑤ ‘명담(名談)’, ‘깜냥’, ‘항용(恒用)’, ‘공리적인 타산’, ‘노방(路傍)’ 등은 고등학생이라면 사전에서 찾아 그 의미를 알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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