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 주유엔 북한대사는 지난달 27일 유엔총회 제4위원회에서 “유엔사는 유엔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사령부”라며 이같이 말합니다. 이어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엔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본부를 찾아 종전선언을 제안한지 한 달여 만에 같은 자리에서 유엔사 해체를 주장한 것입니다.
북한이 오랜 세월 유엔사 해체를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볼 때는 이날 김성 대사의 발언은 어찌 보면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외교가에선 북한이 이 카드를 다시 꺼내든 시점에 주목합니다. 현재 한국 정부가 종전선언에 모든 외교적 역량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은 북한 비핵화 전 6·25전쟁의 당사자인 남·북·미 혹은 남·북·미·중이 전쟁의 종료를 선언할 경우 북한이 유엔사나 주한미군 주둔 등의 당위성을 문제삼을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북한이 ‘전쟁이 끝났는데 왜 정전협정 체제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유엔사가 남아있냐’는 식의 주장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김성 대사의 연설은 이러한 미국의 우려를 증폭시키기 충분했습니다. 한국의 ‘미국 설득’에 재를 뿌린 것이죠. 특히 문재인 정부는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9월 24일 “흥미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밝힌 점 등을 거론하며 북한이 종전선언 제안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4일 “북한은 김여정 당 부부장 담화 등을 통해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며 “한반도의 종전을 촉구하고 지지하는 세계적, 국제적 흐름들도 형성돼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북한이 종전선언 제안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궁극적으로 유엔사 해체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힘을 실은 것입니다.
북한은 유엔사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수차례의 탄도미사일 발사 때마다 나오는 유엔 결의는 무시하고 비판하며 유엔사 해체 주장의 근거로 또 다른 유엔 결의를 들고 나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1975년 유엔총회에서는 유엔사 해체 및 주한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됩니다. 당시 북한은 유엔사 해체를 위해 이같은 결의안을 제출했고, 한국 정부는 이에 맞서 남북 대화 및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보장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협상을 촉구하는 결의를 제출합니다. 유엔 총회에선 당시 회원국도 아니었던 남북한이 올린 결의안을 동시에 채택합니다. 상반되는 내용의 결의안을 동시에 채택하며 분란의 소지를 없앤 것이었는데, 북한이 이를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유엔사 해체 주장과 달리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허구헌날 원색적인 대남 비방을 퍼붓는 북한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김정은이 집권하기 전 북한에서는 오히려 주한미군 주둔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듯한 발언이 많이 나왔습니다. 김일성 집권시기였던 1992년 1월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는 최초의 미·북 고위급 회담에서 아널드 캔터 당시 미 국무부 차관에게 “북·미 수교를 해주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등에 따르면 김정일 국무위원장도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도 2000년 10월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으며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꺼내들기 주저했던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자신들의 비핵화의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김정은은 2016년 7월 내건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5대 조건’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했습니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은 비핵화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었고, 김일성의 손녀 김여정이 연합훈련을 반대 한다며 직접 입 밖으로 내뱉은 것입니다. 갈수록 주한미군 철수에 상응하는 조건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1년에 두 차례 연합훈련이 열릴 때마다 정부의 ‘로우키’ 기조와 상관없이 반발해왔습니다. 연합훈련 중단은 주한미군 철수나 유엔사 해체 등에 비해선 북한이 자주 꺼내든 카드지만 앞선 두 카드와의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도 이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동조한다는 점입니다.
김여정이 연합훈련 시작 전인 지난 8월 1일 경고성 담화를 내놓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통일부는 “연합훈련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하고 나섭니다.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이 즉각 훈련 연기를 주장하고 나선데 이어 고민정·윤미향·우상호·김홍걸 의원 등 총 74명의 범여권 의원들이 연기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리기까지 합니다. 지금까지 매년 정례적으로 해오던 방어적 성격의 한미연합훈련이 한반도 정세의 화근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일정 부분 먹혀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정부의 종전선언 드라이브가 가속화될수록 북한이 점차 수위가 센 주장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의 억지가 반복될수록 그 논리를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생깁니다. 일부 시민단체들만 주장할 뿐 정치권 주류에서는 섣불리 언급되지 않던 한미연합훈련 중단 등의 주장이 이제는 정치권에서 비중있는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합니다. 주한미군 철수나 유엔사 해체 주장도 언젠가는 국내 정치권 주류에서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먹혀들지는 않을지 우려스럽습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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