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12일 존 오소프 미 상원의원과 만나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이를 승인했기 때문”이라고 말해 ‘외교 결례’ 논란이 일고 있다. 야권이 “상상할 수 없는 반지성적 편견을 드러냈다”고 비판하자 이 후보 측은 “한·일 문제에 이해도가 높은 오소프 의원을 칭찬하는 맥락”이라고 해명했다. 여야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이날 상석에 앉아 미국 방한단을 접견한 것을 두고도 신경전을 폈다. 이 후보 측은 “‘오야붕(우두머리)’ 모시기”라고 공격했지만 윤 후보 측은 “격식에 맞게 자리를 배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후보는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협력 덕에 한국은 개발도상국, 식민지 국가에서 경제 선진국이 되는 성과를 이뤘다”며 덕담을 건넸다. 문제의 발언은 이후 나왔다. 이 후보는 “거대한 성과의 이면에도 작은 그늘들이 있을 수 있다”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결국 마지막에 분단된 것도 일본이 아니라 전쟁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할되면서 전쟁의 원인이 됐다는 점은 객관적 사실”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허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집권여당 대선 후보가 처음 만나는 혈맹국 의원에게조차 ‘네 탓’을 시전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다”며 “이 후보의 발언은 복잡한 국제정치적 원인이 작용해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터무니없이 단순화한 반(反)지성적 편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후보의 운동권식 궤변은 더욱 큰 우려와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면담에 배석한 김한정 의원은 기자들을 만나 “그 이야기(가쓰라-태프트 협약)를 꺼낸 것은 오소프 상원의원이 한·미·일 역사와 식민지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애틀랜타 평화의 소녀상 건립 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해 많은 지식이 있다고 들어서 그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교가에서는 직설적인 발언과 상대방을 자극하는 언행을 피하는 것이 ‘외교적 수사’의 기본이라며 이 후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언급은 외교적 결례로 여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현직 대사는 한국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국가 간 불편한 과거를 거론하는 것은 외교적 수사에서 금기시하는 행위”라며 “특히 미국 같은 한국의 최우방국 고위 관계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이 같은 실언을 일선 외교관도 아니고 집권여당의 대선 후보가 꺼내든 것은 그 자체로 외교 문제”라고 혹평했다.
민주당은 그러나 미국 방한단을 접견할 때 자리 배치를 문제삼았다. 윤 후보가 상석에 앉은 것을 두고 “외교적 결례”라고 지적했다. 이 후보 측이 미국 방한단과 마주 앉은 것과 달리 윤 후보가 상석으로 보이는 테이블에 앉고, 미국 방한단과 박진·조태용 국민의힘 의원들이 마주 앉았다.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인 전용기 의원은 “어디서나 ‘오야붕’이신 윤 후보”라며 “보고 있는 참모들은 ‘외교 결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오야붕’ 모시기에 여념이 없다. 한숨만 나온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양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한국경제신문에 “외교적 결례라니 말도 안 된다. 미국 방한단이 예방 온 것을 격식에 맞게 배치한 것”이라며 “윤 후보가 결례를 범한 것인지, 이 후보 측이 과공(過恭)인지는 외교 전문가들이 더 잘 알 것”이라고 밝혔다. 동석한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이재명 후보 측 자리 배치는 정상회담을 할 때의 모습”이라며 “이 후보 측이야말로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이 후보와 윤 후보가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국 차관보와 상원의원 한 명을 면담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해 미국의 공직자들을 만난 것인데 격을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며 “우리 차관보가 해외에 나가 각국의 대선 후보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두 후보 모두 실수했다”고 꼬집었다.
정치권에서도 대선 후보들이 미국의 차관보를 연이어 만나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두 후보 모두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전문성 부족 논란이 제기되다 보니 외교에서 중요한 ‘의전’ 문제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동훈/전범진 기자 lee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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