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에 보답하듯 컬프는 병든 대기업 GE에 메스를 들이댔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그룹 해체다. 부채 축소와 사업별 경영 정상화를 위해 꼭 필요했던 조치다. 전임 CEO가 대안으로 저울질했지만 쉽게 꺼내들진 못했던 카드다. 컬프의 과감한 결단에 박수가 쏟아지는 이유다.
GE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92년 창업한 회사다. 지난해 기준 직원은 20만5000명, 매출은 756억달러(약 89조원)다. GE의 전성기를 연 것은 1981년 회장에 취임한 잭 웰치다. ‘경영의 신’으로 불렸던 그는 6시그마·세계화 전략 등을 토대로 혁신을 일궜다. 20년간 GE를 미국의 기업가치 1위 회사로 키운 웰치는 오점도 남겼다.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금융 계열사인 GE캐피털을 집중 육성한 게 화근이었다. 한때 그룹 수익의 50%를 GE캐피털에 의존했을 정도로 금융 부문은 비대해졌다. 인류에 필요한 것을 선물한 에디슨의 창업정신을 외면하고 ‘머니 게임’에 몰두한다는 비판도 커졌다. 금융 부문을 바탕으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GE 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큰 내상을 입었다.
GE캐피털을 통해 각 분야 최고 기업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GE는 사업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했다. 웰치 후임으로 2001년 취임한 제프리 이멀트 CEO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이후 GE는 투자은행들의 ‘돈밭’이었다. 인수합병(M&A) 등 자문을 대가로 투자은행에 지급한 비용만 72억달러에 이른다.
문어발식 확장은 결국 GE의 발목을 잡았다. 2015년 106억달러에 인수한 프랑스 알스톰에너지는 3년 만에 230억달러를 상각처리할 정도로 큰 피해를 남겼다. ‘덩치 큰 공룡’이 되자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2018년엔 111년 만에 다우지수 구성 종목에서도 퇴출됐다.
컬프는 GE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던 2018년 말 취임했다. 경영 사관학교로 불리던 크로톤빌연수원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외부 출신 CEO다. 취임 당시 주가는 폭락했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일각에선 직원 월급도 못 주는 회사가 될 것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취임 후 그는 불필요한 사업부를 매각하고 배당금을 줄이는 절차를 차분히 진행했다. 경영 개선 상황은 주가로 반영됐다. 컬프 취임 직전 1년간 53% 넘게 하락했던 GE 주가는 그가 취임한 뒤 28% 상승했다.
컬프는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가이젠 시스템을 다나허에 이식했다. 가이젠은 비용 절감을 위한 도요타의 생산성 혁신 프로그램이다. 사업부별로 매달 매출 증가율, 고객 만족도 등을 모니터링하고 개선 사항을 논의했다. 그가 재임한 기간 다나허의 주주 수익률은 465%에 이른다. 같은 기간 S&P500지수가 105% 오른 것을 고려하면 가파른 성장세다.
그는 집무실보다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GE 대표에 오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2018년 취임 후 첫 행선지는 GE의 애틀랜타공장이었다. 임원회의를 하기보다 전력사업부 현장을 찾아 생산성 관리에 나섰다. 컬프 취임 직후 파이낸셜타임스는 “기계와 인간의 경쟁을 보는 것 같다”고 평했다. 전임 CEO들의 무분별한 M&A 탓에 GE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컬프지만 버텨내기엔 역부족일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2000년 6000억달러에 육박했던 GE의 기업가치는 컬프 취임 직후 750억달러까지 줄었다. 그가 취임한 뒤 GE는 서서히 성장을 위해 시동을 걸고 있다. 지난 11일 기준 시가총액은 1180억달러까지 늘었다. 기업 분할은 도약을 위한 또 다른 발판이 될 것이란 평가다. GE는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영업이익률을 20% 정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과감한 결단을 요구해온 행동주의펀드도 컬프의 결정에 화답했다. 넬슨 펠츠가 운영하는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는 “컬프 CEO가 장기적으로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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