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산악도시 볼차노의 거리는 2년마다 클래식 애호가들로 북적인다. 1949년 시작된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열려서다.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 미국의 거장 피아니스트 게릭 올슨, 오스트리아 피아니즘의 정수를 이어온 외르크 데무스 등을 우승자로 배출한 콩쿠르다. 우승 문턱이 높기로도 유명하다. 올해로 63회째를 맞았지만 31번은 우승자를 뽑지 않았다. 깐깐한 심사 때문에 ‘1위 없는 2위’만 선정된 것이다.
올 9월 피아니스트 박재홍(22·사진)은 이런 심사위원들을 홀리며 당당히 우승의 영예를 얻었다. 우승과 함께 부소니 작품 연주상, 실내악 연주상, 기량 발전상, 타타로니 재단상 등 특별상 4개까지 휩쓸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대회를 치를 때면 긴장감 때문에 손에 악보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며 “다행히 연습해본 곡이 경연곡으로 나왔고, 우승보다는 경험을 쌓자는 생각으로 임했더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콩쿠르 당시를 떠올렸다.
박재홍은 부소니 콩쿠르를 재수했다. 18세 때 나갔으나 탈락했다. 4년 동안 그를 담금질한 스승은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다. 박재홍은 손열음, 김선욱, 문지영처럼 김 총장의 제자 그룹 중 한 명이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한 김 총장에게 그는 ‘위클리’라는 특훈을 받았다.
위클리는 음악대학에서 한 학기에 한 번 네댓 가지 곡을 연주하는 실기시험 중 하나다. 학생들이 번갈아 무대에 오르다 보니 1주일에 한 차례 시험을 치러 위클리로 불린다. 김 총장은 콩쿠르를 앞둔 제자들을 불러모아 위클리를 반복해서 열었다. 박재홍은 콩쿠르보다 실기시험이 더 긴장됐다고 했다.
“4년 전 루빈스타인 콩쿠르에 앞서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연주할 때가 가장 떨렸습니다. 분위기가 정말 혹독해요. 팔을 뻗으면 닿을 곳에서 제 연주를 듣고 냉정하게 비평하거든요. 실수를 숨길 수 없어요. 어찌나 떨리던지 페달을 밟기도 어려울 정도였죠.”
그는 실전 같은 연습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기초체력을 길렀다고 했다. 김 총장의 조언이 그에게 방향을 알려줬다.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울 때 음표를 하나씩 짚어나가는 ‘스케일 연습’을 등한시하지 않은 것. “선생님은 실기시험 때마다 기본기를 강조했습니다. 평소 손을 풀려고 건반을 두드리는 기본 연주법을 선후배와 선생님 앞에서 하니 발가벗은 것처럼 부끄러우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선생님의 눈이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죠.”
손가락으로 선보이는 기교만 갈고닦은 건 아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려면 내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걸 알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쉬는 시간이면 예술적 소양을 폭넓게 갖추기 위해 공부했다고 한다. “저만의 개성을 무대에서 보여주려고 마음먹었지만 연주가 제대로 되질 않았어요. 겉멋 부리지 말고 작곡가의 의도만 전하자고 다짐했죠. 작품 해석에 몰두하기 위해 작곡가의 동시대 예술을 연구했습니다. ‘황량함’이란 뉘앙스를 피아노로 표현하려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수없이 읽었어요.”
이렇게 갈고닦은 박재홍의 음악세계를 감상할 무대가 마련된다. 오는 19일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2021 경기피아노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귀국 독주회를 연다.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함머클라비어)’ 등 부소니 대회 때 연주했던 레퍼토리를 들려줄 예정. 그는 “독주회 무대에서도 콩쿠르 때처럼 순간에 몰입하며 정직하게 연주하겠다”고 말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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