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1일 한국경제신문사가 개최한 글로벌인재포럼의 기조연설에서 말한 내용이다. 탄소중립을 위해 기업을 활용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조하면서 꺼낸 얘기다. 그는 “강제적 감축 의무를 부과하거나 탄소세만을 강조하면 규제를 회피하려는 기업의 생리가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의 발언은 비단 탄소중립을 위한 방법론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을 규제하고 압박해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는 정권의 그 어떤 시도도 성공한 전례가 없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냥 착한 기업이 돼라, 양심적인 기업이 돼라, 이런 정도의 ‘스케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대한상공회의소를 이끌고 있는 최 회장의 촌철살인이다.
기업은 사회적 문제를 ‘내재화’할 인센티브가 주어질 때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각 경제 주체의 합리적 이기주의가 극대화할수록 사회적 편익이 커지는 시장 원리와 마찬가지다.
반면 규제라는 채찍을 앞세우면 ‘회피기동’이라는 기제가 작동한다. 규제를 피해 다른 나라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 자동차 업체 피아트는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병한 뒤 본사인 FCA를 네덜란드로 옮겼다. 낮은 법인세와 노동유연성을 찾아 117년간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충격은 컸다. 이탈리아 의회는 보고서를 통해 FCA의 이전으로 세수가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 다른 기업의 도미노 이탈을 불러오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비슷한 사례는 넘친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 가구 업체 이케아 본사도 네덜란드에 있다. 살인적인 법인세율과 반기업 정서를 피하기 위해서다. ‘가전업계의 애플’로 불리는 다이슨도 본사를 영국에서 싱가포르로 옮겼다.
기업들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회사를 옮기는 것을 플립(flip)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 법인을 설립한 뒤 한국의 본사를 그 아래로 집어넣는 방식이다. ‘미국 본사-한국 지사’ 형태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쿠팡이 단적인 예다.
미국 안에서도 플립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특히 델라웨어주가 법인 설립지로 인기가 높다. 기업활동의 자유가 많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포천 500대 글로벌 기업 중 67.8%(339개사), 뉴욕증권거래소·나스닥 상장사 147곳 중 88.4%(130개사)가 델라웨어주에 법인을 두고 있다.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지도 않고,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다중대표 소송에 대한 규정도 없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쿠팡은 증권신고서에서 “한국 기업에 투자하는 데에는 ‘특수한 위험(special risks)’이 있다”며 경영진의 형사처벌을 예로 들었다. “근로기준법,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고발, 제조물 관련 결함이 있으면 기업은 물론 경영진까지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을 수 있다”고 적시했다.
많은 한국 대기업도 이런 이유로 해외 이전을 고민하고 있다. 단지 한국에 뿌리를 둬야 한다는 ‘정서법’과 사회적 반감을 의식해 그동안 금기시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정부가 바뀔 때마다 지배구조를 흔들고, 규제의 강도를 높여 계열사 지분을 강제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실제 ‘제2의 삼성전자’를 꿈꾸는 많은 벤처기업과 스타트업들은 사업이 본격화하기 직전에 한국을 떠난다. 넓은 시장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창업자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한국식 규제를 벗어나기 위한 이유도 크다. 매년 정책과 법안이 손바닥 뒤집히듯 달라지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는 투자자들이 있을까. 막장으로 치닫는 대선판을 지켜보는 기업인들이 정치권에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한국도 기업이 국가를 선택하는 시대가 곧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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