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갑자기 나타난 지옥의 사자들에게서 지옥행을 선고받는 사람들과 이 혼란을 틈탄 신흥 종교단체, 사건 실체를 밝히려는 사람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지옥행 대상자들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신상을 털리며, 인민재판으로 죽어 나간다. 공포에 휩싸인 대중은 감시와 처벌의 집단 광기에 휘말린다.
인간이 맹목적인 폭력으로 인간을 벌하는 장면은 생존을 위한 ‘살인 게임’을 연상시킨다. ‘오징어 게임’도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죽음의 게임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오징어 게임-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옥 같은 공포’라는 기사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암울한 현실의 반사경이라고 진단한 것과 같다.
여기에는 법과 질서가 무너진 사회의 혼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 선동에 쉽게 현혹되는 대중,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고통이 투영돼 있다. ‘지옥’의 광신도 집단을 이끄는 의장과 ‘오징어 게임’의 진행 요원들이 청년층의 상징적 거주 공간인 ‘고시원 방’에서 생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왜 이렇게 어둡고 비관적인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것일까. 디스토피아 소설이나 영화는 모두 픽션이다. ‘유토피아’가 현실에 없는 이상향이듯, ‘디스토피아’ 또한 세상에 없는 세계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 우리가 겪는 난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 원인과 과정을 알면 대처하기가 쉬워진다. 현대 심리학은 이를 ‘방어적 비관주의’ 혹은 ‘부정적 시각화’라고 부른다. 감염병 공포도 예측할 수 없었기에 더 극심했다.
디스토피아 작품들은 이처럼 극단적인 재앙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워 준다. 현실의 악당이 처음엔 선의로 시작한다는 점까지 보여준다. 진짜 재앙을 몰고 올 ‘선의로 포장된 악인’에게 속지 않고 대처할 지혜 또한 알려준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희극보다 비극이 더 오래 읽히는 원리도 이와 닮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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