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가까운 선배들 중에서는 ‘피+쓰리’ 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이불을 물려주고 졸업한 선배를 위해 그 위에 혈서를 써 피쓰리로 불리게 됐다. 이 중 한 명이 내가 2학년 때 복학했다. 어느 봄날 이 선배와 학교 앞에서 낮술을 마시던 중 술집에 있던 리어카를 끌고 교내로 진출했다. 날이 너무 좋고 꽃도 활짝 피어 당시 도서관장으로 있던 학과의 한 교수님을 꽃가마 태워드리겠다는 게 이유였다. 설마 하면서도 리어카는 멈추지 않았고 도서관장실이 있던 6층까지 올라갔지만 다행히 문이 잠겨 있어서 빈 수레로 내려왔다. 생각하면 아찔하다.
타고난 약골에 술도 약한 나는 이 선배들을 따라다니느라 숱하게 고생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졸업한 선배가 갑자기 양복을 입고 나타나 몇 달을 내 자취방에서 모시며 살기도 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대포집 같은 데서 시작한 술자리가 밤이 깊을수록 논바닥이나 길가로 옮겨간다는 거였다. 자리를 잡으면 몸이 꽁꽁 얼 때까지 집에 가지도 못하고 붙들려 있어야 했다. 계속 토악질을 하는 등 약한 척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겨우 풀려나기도 했지만, 날을 새울 때도 많았다. 이상한 게 날이 샐 때까지 버티면 죽겠던 몸도 풀리고 오히려 괜찮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를 쓴다는 이유로 벌인 화려한 일탈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말은 그때 벌벌 떨면서 들었던 말들이다. 시 잘 쓰기보다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한다. 참 소박한 말들이지만 기억에 깊게 남아 있다.
졸업하고 20년이 지나 당시 복학생 선배들과 놀던 형산강 강변과 마을 초입의 느티나무가 있던 곳으로 가보았다. 당시엔 도로변을 따라 내려가면 큰 너럭바위가 있어서 그 위에 앉아 놀았는데, 높게 제방이 쌓여 있었고 느티나무 자리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래도 차가 돌아가는 굽은 길 코너에 세워져 사각을 비추던 거울, 누군가가 수도 없이 돌을 집어던져 상처투성이가 된 볼록거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지난날의 세월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게 전설이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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