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덮은 희끄무레한 파스텔톤 물감 사이사이로 다채로운 모양과 색의 조각들이 비친다. 안개가 짙게 낀 숲속을 걷다 발치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꽃다발, 사막의 모래 먼지를 헤치고 나아가는 카라반, 경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구름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 마을, 전설 속 용과 같은 상상 속의 존재가 수면 밑으로 언뜻 지나가는 모습…. 색과 모양이 제각각인 추상화인데도 그림들은 모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연상시킨다. 권영범 작가의 ‘어떤 여행’ 연작이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권영범 작가 초대전 ‘어떤 여행’이 29일 개막했다. 그가 일상 속에서 발견한 여행의 요소들을 표현한 추상화 30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권 작가는 국내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베테랑이다. 1996년 프랑스 랭스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98년에는 탱귀 시청의 전람회 ‘살롱도톤느’에서 그랑프리를, 이듬해 랭스시 전람회 ‘살롱 오랑쥬’에서 1등 상을 수상했다. 귀국 후에는 2008년 포스코에서 주최한 포항 국제아트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2013년 유나이티드재단에서 우수작가상을 받았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그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미대에 진학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꿈을 포기할 수 없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번 돈을 모아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마칠 수 있었죠. 2001년 귀국한 뒤에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웠어요.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작업실을 16번이나 옮길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작업을 포기하려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가 지난 20여 년간 ‘어떤 여행’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데는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권 작가는 “유학 시절은 물론 귀국한 뒤에도 계속 ‘나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러던 중 일상 자체가 여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권 작가는 여러 색채와 모양을 층층이 그려 넣은 뒤 화면의 중심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흰색이나 파스텔톤 물감으로 덮는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마치 알 수 없는 환상의 세계로 향하는 문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감을 두텁게 발라 유화의 질감을 살려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즐겨 쓰고, 형상과 색의 경계가 연하다는 점에서는 18세기 영국의 국민화가 조지프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권 작가는 “일상이라는 여행에서 얻은 여러 기억이나 경험들이 망각의 안개에 덮이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말했다. 물감에 덮이지 않고 남아 있는 다채로운 색과 그 가운데 있는 표지판의 이미지는 망각에 쓸려나가지 않은 소중한 추억을 상징한다. 그가 캔버스와 액자를 직접 제작하는 것도 여행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나무가 싹을 틔워 목재와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여행과도 같다는 설명이다.
권 작가는 최근 평단과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예술평론가 장 피에르 아넬은 평론에서 “권영범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선과 색, 물감의 얼룩과 같은 질감은 마법처럼 섬세하고 우아하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현대건설과 미술 스타트업 하비우드가 협업해 아파트 입주민에게 그림을 대여·판매하는 ‘홈갤러리’ 서비스에서도 유독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전시는 다음달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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