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삼성' 공언 후 칼빼든 이재용…"실리콘밸리 방식 삼성에" [분석+]

입력 2021-11-29 21:00   수정 2021-11-30 09:23


최근 '뉴 삼성'을 거듭 강조한 이재용 부회장의 의중이 녹아든 삼성전자 인사제도 혁신안이 29일 발표됐다. '미래지향'이란 수식어를 단 게 눈에 띈다.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인재제일'과 '신경영' 철학을 이어받으면서도 글로벌 감각에 강점을 지닌 이 부회장이 미국 실리콘밸리 방식의 유연하고 수평적 분위기를 삼성에 심는 체질 전환 시도다.
"계승하면서도 개선" 이재용의 인사제도 실험
과거 이병철 선대회장은 '인재제일'을 회사의 핵심가치로 삼았다. 그는 1957년 국내 최초로 공개채용을 실시해 우수 인력을 확보했다. 연고주의 인사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한 인사시스템을 마련하는 등 삼성은 인재 육성과 조직 성장을 위한 시스템을 본격 구축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를 이어 받아 신경영을 통해 능력 위주 인사를 정착하기 위한 제도 개혁에 앞장섰다. 1993년 국내 최초로 대졸 여성 공채를 시행했고 1995년에는 학력 제한을 완전히 없애는 '열린 채용'을 선보였다. 여성 전문직제 도입, 여성 임직원 대상 교육·리더십 기회 확대 등 당시로선 파격적 인사 혁신을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삼성은 우수 인재 발굴을 위해 암기 위주의 필기시험을 1993년 폐지하고 지원자의 종합적 자질을 평가하는 삼성직무적성검사를 도입했다. 2005년에는 대학생 인턴제, 2011년에는 장애인 공채 등 제도 도입에 앞장섰다.


이같은 흐름을 계승·발전시킨 이 부회장은 직원들이 개개인 역량을 개발하면서 회사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한 제도 혁신을 추진해왔다. 특히 그는 조직 변화를 위해선 수평적 문화 정착이 필수라는 판단으로 2016년 직급 단순화를 골자로 하는 제도 개편을 실시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기존 7단계의 수직적 직급 단계를 직무 역량 발전 정도에 따른 4단계의 경력개발 단계로 변경하고, 직원 간 호칭도 '○○님' 또는 '○○ 프로'로 바꾼 바 있다. 이를 한층 진화시킨 시도가 이날 삼성전자가 발표한 '미래지향 인사제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실리콘밸리식의 수평적이고 유연한 조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전문성 중시하는 수평 조직문화 정착시킬 것"
새 인사제도는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으로 변화 가속화 ▲임직원들의 몰입과 상호 협력 촉진 ▲업무를 통해 더 뛰어난 인재로의 성장 세 가지 목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을 위해 직급별 '표준체류기간'과 승격 포인트를 폐지하고 과감한 발탁 승진이 가능하게 했다. 삼성전자의 직급단계는 CL(Career Level) 4단계(CL1∼CL4)로 돼 있다. 기존 CL2(사원·대리급), CL3(과·차장급)는 각각 10년 가까이 지나야 승격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업무 성과와 직무 전문성에 따라 몇 년 만에도 승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부사장·전무'로 나뉘던 임원 직급을 '부사장'으로 통합해 임원 직급 단계를 축소했다. 기존에는 능력을 인정받아도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를 단축시켰다. 30대 임원, 40대 최고경영자(CEO)가 나올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됐다.


삼성전자는 사내 인트라넷에 직급 및 사번 표기를 없애고 승격 발표도 폐지하기로 했다. 아울러 상호 높임말 사용을 공식화해 직원들이 서로 직급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삼성은 국내 다른 기업들이 공채 제도를 폐지하고 상시채용 트렌드를 택하는 상황에서도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공채 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삼성이 공채를 지속함으로써 국내 채용 시장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일하는 과정에서 의사소통할 때 직급이나 연차가 개입될 여지를 없애고, 능력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주요 거점에 공유 오피스를 설치하고, 사업장 내 카페나 도서관 등에 '자율근무존'을 마련해 언제 어디서나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구축키로 한 것도 실리콘밸리식 자유로운 업무환경 조성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기업들도 영향 받을 전망"

이 부회장이 직접 챙긴 새 인사제도는 '뉴 삼성'을 향한 새로운 도전에 부응하는 미래지향적 면모를 담았다. 그는 최근 미국 출장길에 "추격이나 뒤따라오는 기업과의 격차 벌리기만으로는 이 거대한 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며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 새로운 삼성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되풀이 강조했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은 이 부회장이 구상하는 '뉴 삼성'을 본격 가동하는 첫 해가 될 것"이라며 "글로벌 감각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 부회장이 실리콘밸리의 일하는 방식을 삼성에 도입하기로 결정한 만큼 다른 국내 기업들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성과를 못 내거나 자리만 차지하던 임원들의 경우 이번 인사 개편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며 "연차와 각종 보고서에 막혀있던 '젊은 감각'이 이 부회장의 뜻대로 제대로 발현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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