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 전기 설비직 종사자가 전자파, 벤젠 등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해당 근로자에게 발생한 재생불량성 빈혈은 산재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어도 산재로 인정된 사례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1월 29일 전기공 A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청구한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이 같이 판단하고 A의 손을 들어줬다.
1994년부터 건설현장 등에서 일용직 전기선로공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A는 1996년엔 2년 6개월 정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기술직으로 일하기도 했다. A는 2011년 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게 됐고 산재 요양 신청이 거부되자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골수에서 혈구 생성이 잘 되지 않아 적혈구나 백혈구, 혈소판이 감소하는 희귀 질병이다.
A는 “전기선로공으로 근무하면서 활선상태 작업을 해 전자파에 장기간 노출됐고, 특히 반도체 공장에서 2년 6개월동안 근무하면서 벤젠 등 유해 물질에도 노출돼 발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단은 A의 업무 경력이 명확하지 않으며, 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도 불분명하다고 맞섰다.
법원은 A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는 전기공으로 근무하면서 지속적으로 극저주파 자기장에 노출됐고, 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면서 노출된 벤젠 등 유해 화학 물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병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극저주파에 노출될수록 골수성 백혈병 발병률이 높아진다는 다수 연구결과가 있는 점 △벤젠이 재생불량성 빈혈의 직업적 요인으로 잘 알려진 점 △반도체 공정 중에는 벤젠이 발생하는 점 △공장 공기를 재순환시키는 클린룸에서는 유해물질이 공정 내로 재유입될 가능성이 있는 점 △A가 근무하던 과거에는 전자파가 화학물질 유해성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희귀질병으로 산재 인정 여부를 두고 논란이 돼 왔다. 지난 2018년 11월에도 서울행정법원은 반도체 공장에서 4년여간 일하다 이 질병에 걸린 근로자에게 근로복지공단이 내린 요양불승인 처분을 취소하고 근로자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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