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마따나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다를 게 없는 세계 최빈국 신세였다. 맨손으로 건국한 지 2년도 안 돼 3년간 전쟁까지 치른 나라의 경제는 비참했다. 한 해 나라 살림살이(국가예산)의 절반 이상을 미국 원조에 의존해야 했다. 대다수 국민의 삶이 처참했다. “매년 3~4월이 되면 농촌 주변의 야산이 일직선의 허연 띠를 둘렀다. 식량이 떨어진 농민들이 야산에 기어 올라가 키 닿는 데까지 모조리 소나무 껍질을 낫으로 갉아내기 때문이었다.”(정운갑, 재계회고) 농민들이 풀뿌리·나무껍질로 목숨을 부지한 기막힌 시절이 이어졌다.
가난은 인간의 품격을 시험한다. 1950년대에 상영된 영화 ‘초설(初雪)’이 그 실상을 담아냈다. 기차역에서 유연탄을 훔쳐 서울 명동 요리집을 운영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석탄을 때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던 시절, 연료인 유연탄을 미국과 일본에서 원조자금으로 들여왔는데 줄줄 새나간 것이다. “남자들이 삽을 들고 달리는 기차에 뛰어올라 석탄을 퍼 철로가로 뿌려놓으면 부녀자와 아이들이 주워 담았다.”(이임광,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 영화에서 대놓고 소재로 삼을 정도였으니 미국 원조당국이 모를 리 없었다. 윌리엄 원 한국 주재 경제조정관이 송인상 당시 부흥부 장관에게 “철도청이 도난당한 석탄이 10만t이 넘는다고 한다. 명동 음식점들이 모두 철도청 유연탄으로 음식을 만든다는 얘기도 있다”고 꼬집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때 한국 정부가 중대 결정을 내렸다. 증기기관차를 폐기하고 디젤기관차로 전면 대체하기로 했다. 연료 효율이 훨씬 뛰어나고 속도도 빠른 디젤기관차를 언젠가는 도입해야 했던 터에, 유연탄을 대놓고 훔쳐대는 국민을 더는 방관할 수 없었다. 그러자 철도청 직원들이 파업을 벌였다. 증기기관차 운행에 필요하던 기관사, 화부, 수부 등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짭짤한 부업거리였던 ‘석탄 밀매’가 막히는 것도 큰 요인이었다. 그런 장벽을 뚫고 디젤기관차 체제로 이행한 것은 철도기술 발전의 계기에 그치지 않았다. 가난을 핑계 삼아 찌들어가던 국민의 양심과 품격에 경종을 울렸다.
가난은 ‘있어야 할 것’의 결핍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타락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사자를 각성시켜 도약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미국 원조에 기대던 시절 한국 정부의 정책이 그랬다. 옷에 다는 단추 하나 제대로 만들 기술이 없던 한국에 미국은 필요 물품을 수입해 쓰는 데 원조자금을 쓰라고 종용했다. 필리핀 파키스탄 등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던 다른 나라 대부분이 그렇게 했다. 한국 정부는 달랐다. 원조당국과 싸워가며 농업 생산 증대를 위한 비료공장을 짓는 등 자립 기반을 다졌다. 당장의 앞가림도 어렵던 1950년대, 전체 예산의 50%를 국방비에 쓴 데 이어 20%를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 배정했다. 1954년 26%였던 전 국민 문맹률을 1959년 4%로 떨어뜨리는 기적과 함께 자립과 자존의 토대를 굳건하게 마련했다.
내년 3월 치러질 차기 대통령 선거의 여당 후보가 화전민, 화장실 청소부, 탄광·건설노동자, 요양보호사, 미싱사, 환경미화원 등 자기 가족들의 직업을 나열하면서 “제 출신이 비천하다”고 말한 것은 그런 점에서 짚어볼 여지가 있다. 그런 뜻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언급한 직업을 가진 당사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를 줄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동영상에서 소년공 시절 “평생 공돌이로 썩지 말자”고 적은 일기장을 공개했던 터라 걱정이 더해진다. ‘공돌이’와 ‘썩다’는 묵묵하게 공장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를 허탈하게 만든 표현이었다. 스스로를 담금질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자기만 읽는 일기장의 한 줄로 남겨뒀어야지, 대통령 출사표에서 그런 구절을 공개한 것은 경솔했다. 그의 직업적 편견과 출세주의를 의심케 할 만했다. ‘비천한 출신’이라는 엊그제 발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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