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드 그리그의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민속 설화를 소재로 쓴 입센의 희곡에 붙인 극 부수음악이다. 몽상가 난봉꾼인 페르 귄트는 기쁨과 슬픔이 얽힌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지치고 늙은 몸으로 고향의 오막살이로 돌아온다. 백발이 된 솔베이그는 페르 귄트와 만난다. ‘그대의 사랑이 날 구원해주었다’고 말하며 페르 귄트는 쓰러진다. 그는 자기를 위해 순결하게 남아 있는 솔베이그의 무릎에 엎드려 평화롭게 죽음을 맞는다.
북유럽의 빙하와 피오르는 핀란드의 시벨리우스가 잘 그렸지만 어딘지 초현실적이다. 반면 노르웨이 출신인 그리그가 그린 북유럽의 숲은 침엽수 냄새가 나며 손에 잡힐 듯하다. ‘북유럽의 쇼팽’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정적인 멜로디와 고전적인 구성미로 북유럽 음악을 잘 다듬어 세계인의 감성과 공감하도록 내놨다. 노르웨이의 향토색을 강하게 나타내면서도 독창적인 멜로디는 영원한 고전으로 남았다. 31세 때 곡을 쓰기 시작해 이듬해 여름에 다섯 곡의 전주곡, 행진곡, 춤곡, 독창, 합창곡 등 23곡으로 완성한 ‘페르 귄트’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숱한 명연이 즐비하지만 이 곡은 작곡가와 동향인 노르웨이 출신 외이빈 피엘슈타트(Øivin Fjeldstad, 1903~1983)의 지휘로 듣고 싶다. 따스한 정감의 온도를 LP로 느끼기 좋은 녹음이다. 노을 지는 북유럽의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다. 오슬로 음악원과 라이프치히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베를린에서 클레멘스 클라우스에게 지휘를 배운 피엘슈타트는 오슬로 필하모닉의 콘서트마스터로 활동하다 지휘도 겸했다.
피엘슈타트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 음반에는 10개의 대표적인 곡이 발췌 수록됐다. 정경화의 음반으로 알려진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레이번 등이 참여한 1958년 런던 킹스웨이홀 녹음반이다. 굵직한 현의 질감과 피어오르는 듯한 관악기의 앙상블이 그리움을 자극한다. ‘아침의 기분’은 소박한 노르웨이의 풍경을 그려낸다. ‘오제의 죽음’과 ‘솔베이그의 노래’는 섬세한 프레이징으로 심금을 울린다. 이에 비해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는 느리게 시작해서 점차 빌드업을 거쳐 엄청난 흥분이 휘몰아친다. 64년이 지난 요즘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박진감 넘치고 덩치 큰 울림이 뿜어져 나온다. 아련하고 소박한 음색뿐만 아니라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실감케 해주는 이 음반 곳곳에는 북유럽처럼 비경이 숨어 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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