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올해는 피할 도리가 없다. 그룹들은 경쟁이나 하듯 1970년대생 CEO를 ‘전략적’으로 포함한 발탁 인사를 단행했다. 충격요법이다. 그저 그런 인사를 했다는 세평(世評)을 듣기 싫어서라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젊음=경륜 없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각 그룹의 인사평가도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대기업 CEO 인사는 청와대 인사 못지않은 엄격한 내부 평가와 검증, 평판조회를 거친다. 삼성은 정확한 인사 판단을 위해 경쟁사 CEO의 의견까지 청취한다. 한때 삼성에서 사장 되기가 장관 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광풍에 휩쓸리듯 쓸려가버린 대규모 물갈이 인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성과에 기반하기보다는 보여주기식 인사 아니냐는 지적이다. 경영권 승계 추세에 맞춰 기존 경영진을 ‘공과’ 구분 없이 밀어냈다는 지적도 있다. 주요 그룹은 임원의 직급별 연령 상한선을 두고 있다. ‘용퇴’라고 표현하지만 1950년대생 사장급 CEO는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업(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균형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있다.
CEO 인사가 중요한 이유는 변화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압축성장을 이끈 주역은 누가 뭐래도 기업이다. 그중에서도 CEO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이번에 발탁된 신임 대표 모두 내부 승계 프로그램에 따라 ‘잠재적 CEO 후보군’으로 평가받는 S급 인재임에 분명하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라서고, 유지할 수 있는 힘도 리더십에서 나왔다. 한 전직 삼성전자 최고위 경영진은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까지 삼성전자 모든 CEO가 각자 맡은 시점에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반도체라는 집을 짓기 위한 기반을 다지고, 바통을 이어받아 그 위에 흔들리지 않는 건물을 올리고, 다음 주자는 세계 1등 제품으로 층수를 쌓았다. 그렇게 삼성전자의 역사와 초격차의 DNA를 만들었다. 단 한 명도 실패 없이 제 역할을 다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는 운이 좋았다.”
올해 유난히 파격이 많은 대기업 인사의 긍정적인 지점은 절박한 위기의식의 결과라는 점이다. LG그룹 임원 승진자 132명 중 62%(82명)는 40대였다. SK그룹은 임원 승진자 133명의 3분의 2인 67%를 새 먹거리 분야에 배치했다. 롯데는 178명 승진자 중 53%(96명)가 신규 임원이었다.
이 같은 쇄신 인사는 내부의 절박한 필요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많은 기업들 안에서는 인사를 앞두고 신랄한 자기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한국 최고의 연봉을 받는 임원들이 변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갖추어진 시스템 안에서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올해 인사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수장이 된 경계현 사장은 2014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년사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고 했다. 이 회장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신년사다. 지금의 팬데믹 상황을 예견이나 한 듯 다시 봐도 촌철의 지혜가 느껴진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 속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합니다. 산업의 흐름을 선도하는 사업구조의 혁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기술혁신, 글로벌 경영체제를 완성하는 시스템 혁신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갑시다.”
CEO들의 책무는 무한하다. 올해 인사가 진정한 쇄신의 출발인지, 보여주기식 모방인지는 내년 이맘때쯤 판명될 것이다. ‘데이원(Day 1)’을 시작하는 모든 CEO의 영광과 분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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