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부자' 집주인의 배신?…전세계약 만료 앞두고 '날벼락' [최예린의 사기꾼 피하기]

입력 2021-12-11 14:10   수정 2021-12-11 15:49


“전세 계약 끝난지 1년 3개월이 넘었는데 여기에 발이 묶여 있어요. 대출 받아서 보증금 1억3000만원을 마련했는데, 이젠 너무 지쳐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기대도 사라졌네요.”

기자가 지난 6월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만난 김모씨는 전세 사기를 당했습니다. 김씨는 2018년 5월 이 집에 전세로 들어갔습니다. 집값이 저렴한 화곡동은 사회초년생 김씨가 터를 잡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건 지난해 2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보증금을 돌려달라는 김씨의 연락에 집주인은 잠적해버렸습니다.

집주인은 80여채의 부동산을 소유한 임대사업자 한모씨 남매였습니다. 이 남매는 세입자 25명에게 전세 보증금 27억3850만원을 돌려주지 않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 '갭투기' 전세금 사고 계속돼

‘갭투기’로 인한 전세금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씨 남매와 같은 갭투기꾼들은 전세가와 매매가의 갭(차이)이 작거나 아예 없는 매물만 골라 구매합니다. 자기 돈은 거의 들이지 않고 세입자의 전세금만을 이용해 부동산을 늘리는 방식이죠. 문제는 전세보증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임대인이 돌려막기 끝에 잠적하는 경우입니다. 세입자는 보증금을 날리거나,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런 전세 사기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정리했습니다. 임대차 계약을 체결할 때 꼭 확인해야 하는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 등기부등본에서 가압류, 근저당 확인은 필수

꼭 해야 할 일은 입주할 집의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는 겁니다. 등기부등본은 부동산에 관한 권리관계를 기록한 문서입니다. 대상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 저당권, 전세권, 가압류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법원 인터넷등기소에서 해당 부동산의 주소를 검색하고, 700원을 내면 열람할 수 있습니다.



해당 부동산에 가압류나 근저당이 걸려있다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소송이나 경매를 진행하더라도 어렵습니다. 이 집을 팔아서 돈이 나오면, 등기부등본상의 순위에 따라 관계자들이 돈을 가져가기 때문인데요. 미리 설정돼있던 근저당권이 있다면 나의 전세 보증금은 순위가 밀리는 거죠.

한씨 남매가 화곡동에 소유한 두 개 건물 35가구에는 근저당권 25억2650만원이 설정돼있습니다. 남매가 이 집을 담보로 제2금융권, 대부업체 등에서 빌린 돈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이사 간 이전 세입자들이 설정한 가압류 내역 15억7530만원이나 됩니다. 지금 화곡동 세입자들의 임차권은 이보다 순위가 한참 밀려있습니다.



한씨 남매가 소유한 강서구 화곡동 다세대주택의 실제 등기부등본을 살펴보겠습니다. 소유권을 기록한 ‘갑구’ 4순위에 6930만4609원의 ‘가압류’가 기록돼있습니다. 채권자 고모씨가 집주인 한모씨에게 청구한 금액입니다. 근저당권과 전세권을 기록한 ‘을구’에는 1순위로 서서울농업협동조합에서 설정한 7억800만원이 있습니다. 4순위에는 근저당권자 전모씨가 3000만원이 있고요. 가장 마지막 5순위로 세입자 윤모씨가 설정한 임차보증금 6000만원이 있습니다.

나중에 경매를 통해 이 부동산을 강제로 처분하더라도, 순위가 앞서는 채권자와 근저당권자가 돈을 가져가는 게 먼저입니다. 같은 건물의 비슷한 매물은 경매 과정에서 6100만원으로 감정됐습니다. 선순위 채권자와 근저당권자가 돈을 가져가면 남는 돈이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부동산 892채 가졌지만 실상 빈털털이...‘건물부자’일수록 경계해야

같은 건물에 입주한 정모씨는 등기부등본을 떼어보고도 당했습니다. 한씨 남매가 ‘건물 부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계약 당시 공인중개사는 세입자들에게 한씨 남매를 ‘건물 부자’로 소개했습니다. 화곡동에만 빌라 건물 몇채를 가지고 있고, 전국에 수십채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씨는 “등기부등본에 근저당권이 7억원이나 설정돼있길래 계약을 망설였다”며 “그런데 공인중개사는 오히려 ‘집 주인이 부자라 이 정도 근저당은 별 거 아니다’라며 안심시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매는 빈털터리었습니다. 김씨는 소송에 이겨 남매의 은행 계좌를 모두 압류했지만, 돈이 들어있는 통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집주인이 납부해야 하는 가스·수도요금도 300만원어치가 밀려 이 건물에는 물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같은 건물의 세입자 구모씨는 “300만원도 납부하지 않는다는 건 이 사람들이 정말 빈털터리라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전세 사기 사건의 장본인은 겉으로만 ‘건물부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2019년 화곡동에서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고 잠적해 논란이 된 강모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동산 283채를 소유해 ‘큰손’으로 불렸지만 사실은 전세금을 돌려막기하던 빈털터리였죠. 강씨와 공범 공인중개사 조모씨는 사기 혐의로 지난해 11월 남부지검에 송치됐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임대사업자 중 가장 많은 집 소유한 김모씨(892채), 지난 5월 기준으로 397채를 보유했던 ‘세 모녀’까지 드러났습니다.
○전세보증보험 들어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수입니다. 보증보험에 미리 가입하면 집주인이 보증금 반환을 거부해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나 한국주택금융공사 등이 대신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지급합니다.

사회적으로 전세금 사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19년 이전에 계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보증보험의 존재나 필요성을 잘 몰랐습니다. ‘갭투기대응시민모임’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금 사고 피해자들의 82.4%가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곡동 전세사기 피해자인 정씨도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못했습니다. 정씨는 “보증보험의 존재는 알았지만, 사기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가입할 생각을 못했다”며 “뉴스에서만 보던 일을 내가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보증금을 날리면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데...”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습니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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