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4일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을 위해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자들과 만나서 한 말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추진 선언은 곧바로 이뤄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개월 가까이 시간을 끌던 정부는 몇 발 후퇴해 가입 추진을 위한 의견수렴 절차를 밟겠다고 나섰다. 정부 안팎에서는 내년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의식한 여당의 압력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 로드맵은 농민단체들의 반대 목소리에 막혔다. 11월 가입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내년 2월 발효될 예정인 가운데 CPTPP 가입까지 가시화되자 농민단체들은 적극적으로 반대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RECP 발효와 관련된 피해 대책부터 정부가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해당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CPTPP 가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최범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RCEP 국회 비준으로 농촌 현장의 불안감이 커진 상황에서 정부가 CPTPP 가입마저 선언한다면 이를 농업 포기, 나아가 먹거리 주권 포기로 간주하고 대정부 투쟁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CPTPP 의장국인 일본과의 관계도 걸림돌이다. 한국이 CPTPP 가입을 타진하자 일본 정부는 한·일 간 현안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중 최우선 해결 과제로 지적된 것이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해제다. CPTPP는 모든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가입국을 결정하는 만큼 일본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하면 가입이 불가능하다. 이 같은 문제가 중첩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은 일찌감치 정부에 속도조절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당 관계자는 “당정 간 조율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가입을 천명한 홍 부총리가 오히려 앞서나갔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으로 지지층이 분열해 이후 대선과 총선에 참패했다는 시각이 당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도 문제점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2011년 “내가 당시 대통령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한·미 FTA를 추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CPTPP 가입 결정은 내년에도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6월 지방선거 전까지 가입 의사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인 문제가 부각될 수 있어서다.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CPTPP의 정치 쟁점화에 부담을 느낀 새 정부가 가입 추진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의 CPTPP 가입이 늦어지면서 지각 비용은 더욱 불어날 전망이다. 당장 다음달부터 중국과 대만, 영국의 CPTPP 가입 협상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가입 국가가 늘어날수록 후발 국가의 가입 조건은 더욱 까다로워진다. 데버라 엘름스 싱가포르 아시아무역센터 대표는 “한국의 CPTPP 가입 의사 표명이 늦어질수록 손해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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