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전자행정력을 동원해 납세자의 금고와 호주머니를 뒤지지 못하던 시절에도 국가는 세금을 무척 사랑했다. 애인도 많고 챙길 측근도 많아 유독 씀씀이가 헤펐던 영국 왕 찰스 2세 때 영국 왕국의 세금 사랑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뜨거웠다.
자가이건 월세이건 불문하고 가정마다 후끈후끈 불을 때서 난방하고 음식을 데워 먹는 벽난로가 있는 집이라면 세금을 낼 여유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각 집의 벽난로 1개당 2실링을 챙겼다. 물론 국가는 공평했다. 집이 커서 방이 여럿이고 방마다 벽난로가 있는 부자는 벽난로 숫자대로 세금을 계산했다. 상한선은 없다.
이와 같은 벽난로 세가 제정된 것은 1662년,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집행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벽난로 수를 정확히 확인하려면 집마다 들러 방방이 문을 열고 세어봐야 했다. 사생활을 신성시하는 영국인들로서는 극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벽난로 세는 수십 년을 버텼다. 납세자의 볼멘소리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찰스 2세는 사생아만 잔뜩 낳고 죽었다. 왕위를 계승한 아우 제임스 2세를 쫓아버린 명예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자 벽난로 세는 슬그머니 새로운 세금으로 변신했다. 이름하여 창문세. 집 밖에서 창문 숫자를 세어 창문 숫자만큼 세금을 매기는 것은 간편하고 합리적이었다. 이번에도 세금은 공평했다. 1695년 창문세 법안은 모든 가구당 기본 2실링을 책정하고, 창문이 10개 이상인 집에 사는 사람은 4실링의 가산세, 창문이 20개 이상인 가구는 8실링의 가산세를 부과했다.
창문 숫자대로 세금 걷는 재미에 푹 빠진 세무당국은 1709년에 상한선을 살며시 올렸다. 정치적으로도 현명한 조치였다. 창문이 30개 이상 되는 대저택에 겨우 8실링의 가산세만 부과하는 것은 창문이 몇 개 안 되는 집에 사는 서민들 정서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이에 창문이 20개 이상 30개 미만인 가구는 10실링, 30개 이상인 가구는 20실링의 세금을 내도록 법을 개정했다.
큰 집에 사는 부자들을 가산세로 응징한 1709년 영국의 창문세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교하고도 집요한 부동산 관련 세금들을 바라보며 무척 대견하게 여길 것이 틀림없다. 정작 창문세 본인은 1746년 부자들의 압력에 굴복해 창문당 2펜스, 창문세 최고 한도도 창문 25개 이상 가구에 일괄 2실링으로 묶이는 수모를 당했으니 말이다. 세기가 바뀌자 1851년에는 왜소해질 때로 왜소해진 영국의 창문세는 폐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이 사는 집의 창문 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굳이 센다면 통 크게 소유한 집의 수를 센다. 감히 집이 2채 이상인 자는 엄히 문책한다. 게다가 과세 기준 자체가 섬세하다. 주택의 채광은 물론이요 교통, 편의시설, 공교육, 사교육, 주민의 자부심, 남들의 선망과 시기심 등 유·무형의 가치가 반영된 공시가격을 추적한다. 그야말로 선진국다운 품격을 보여준다. 더욱이 시기심을 과도하게 유발하는 주택에는 종합부동산세의 대상이 되는 영예를 수여한다. 어디 그뿐인가. 행여나 세수가 부족할까 봐 집권당과 행정부는 주택 가격을 선진국 수준으로 급속히 끌어올려 세금을 선진국 중 최고 수준으로 징수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K팝’이 자랑스럽고 ‘K방역’이 뿌듯한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K세금’의 선진성은 그 누가 감히 따라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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