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매혹의 예술, 스타일이 되다

입력 2021-12-13 17:12   수정 2021-12-14 00:08


유려한 곡선, 아름다운 실루엣, 섬세한 꽃 장식.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림을 보는 순간 단숨에 시선을 빼앗긴다. 체코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의 작품이다. 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곧 하나의 스타일이 돼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다. 작가가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스타일만큼은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F. 샹프누아 인쇄소 포스터’(사진)이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포스터, 달력 등에 들어간 것이다. 포스터와 달력이 사람들에게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무하는 이를 통해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닫혀 있는 응접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포스터 하나로 파리를 휩쓴 무하
무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이웃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등 틈틈이 작업을 했다.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파리로 떠나며 이뤄졌지만, 안타깝게도 긴 무명 생활을 견뎌야 했다. 30대에 이르러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책과 잡지 등의 삽화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준비된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오기 마련. 무하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처럼 그 기회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1894년 무하는 돈을 벌기 위해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휴가를 간 다른 직원을 대신해 홀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르네상스 극장의 매니저가 급히 인쇄소를 찾아왔다. 매니저는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를 그릴 삽화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휴일이라 구하지 못하고 무작정 인쇄소까지 온 것이었다.

혼자 인쇄소에 있던 무하는 덜컥 이 작업을 맡게 됐다. 그는 당시 파리에 판을 치던 선정적인 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 길이 2m에 달하는 포스터에 신비롭고 우아한 여성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공연을 앞두고 파리는 무하의 포스터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파리 시민들도 그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됐다. 몰래 포스터를 뜯어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등 뜨거운 열풍이 일었다.

무하가 이를 통해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순수예술에 비해 폄하됐던 상업예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상업예술도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가 12개의 별자리와 여인을 함께 그려 넣은 ‘황도 12궁’도 실내용 달력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으로 인해 달력 주문이 폭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예술엔 어떠한 경계도 없다
무하는 1890~1910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에 섰다. ‘새로운 예술’이란 뜻의 아르누보는 정형화된 전통 예술에서 벗어나 차별화된 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탄생한 양식은 섬세한 곡선, 우아한 여성, 아름다운 꽃과 자연 등이 주를 이룬다. 무하의 작품이 곧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셈이다.

그런데 1910년대에 이르러 무하의 작품 성격은 이전과 달라졌다.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담은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여정은 길고 지난했다. 1912년부터 14년간 총 20점의 작품을 그렸다. 무하의 이런 행보는 평소 품고 있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신과 연결된다. 그는 예술가라면 민족과 조국을 위한 작품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강력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애국심으로 인해 무하는 비극적인 말년을 맞이했다. 1939년 나치가 프라하를 침공했을 때 무하는 이들에게 체포돼 수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그리고 79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나아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화폭에 담아낸 무하. 예술엔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삶과 작품들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7과 3의 예술’에서 7과 3은 도레미파솔라시 ‘7계음’, 빨강 초록 파랑의 ‘빛의 3원색’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큰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철학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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