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미세공정뿐만 아니라 기존 공정에서도 기술 혁신을 이어가겠다.”
최시영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이 지난 10월 한 포럼에서 한 얘기다. 3㎚(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 양산을 차질 없이 준비하는 한편 7㎚ 이상 성숙 공정에서도 혁신을 거듭해 기술 차별화를 이뤄내겠다는 의미다.
첨단·성숙 공정 모두 잡아
최 사장의 호언장담이 현실이 됐다. 1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IBM의 서버용 칩과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MCU(마이크로컨트롤러)를 모두 수주했다. IBM의 서버용 칩은 신기술이 적용된 첨단 공정,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MCU는 성숙 공정으로 분류된다. 삼성전자가 업계 1위인 TSMC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7㎚ 이하 첨단 공정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술력의 척도로 불린다. 세계에서 삼성전자와 TSMC만 생산이 가능하다. MCU를 비롯한 성숙 공정 반도체 시장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3분기 기준 TSMC 매출의 57%가 16㎚ 이상 성숙 공정에서 나왔을 정도다.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TSMC를 넘어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올 들어 두 기업의 시장점유율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17.1%로 2분기보다 0.2%포인트 낮아졌다. 반면 TSMC는 2분기 52.9%에서 3분기 53.1%로 점유율이 올랐다.
TSMC 의존이 수급난 가중
업계에선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붕괴가 삼성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MCU는 TSMC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시장이다. 초미세공정 기술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고객사의 세세한 요구사항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 MCU 업체들이 업력이 오래된 TSMC를 선호한 이유다. 또 다른 대만 파운드리 업체 UMC까지 포함하면 두 업체의 MCU 제조 점유율은 80%에 달한다.
반도체 공급난이 이어지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제품을 빨리 받기 위해 거래처를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시장조사업체 서스퀘하나파이낸셜그룹에 따르면 반도체를 주문한 뒤 물건을 받을 때까지 걸리는 기간인 ‘리드타임’이 올해 들어 22주까지 늘어났다. 6~9주면 배송까지 마무리됐던 예년의 세 배 수준이다. MCU는 반도체 중에서도 병목 현상이 심한 편이다. 일부 MCU 제품의 리드타임은 40주까지 걸린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주요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가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며 “거래처를 늘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날수록 삼성전자에 돌아가는 파이가 커진다”고 말했다.
‘탈TSMC’를 준비 중인 기업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IBM 외에도 다양하다. 미국의 AMD는 삼성전자 5㎚ 공정에 크롬북에 들어가는 CPU(중앙처리장치) 파운드리를 맡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AMD 역시 생산 차질을 고려해 파운드리 다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생태계 조성이 관건
삼성전자는 반도체 협업 생태계를 강화하고 있다. 오랜 업력을 바탕으로 ‘디테일’에 강점이 있는 TSMC를 넘어설 해법을 협업 네트워크로 판단한 것이다. 고객사 설계에 따라 품질 높은 칩을 제조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칩 제조 이전 설계와 디자인 단계부터 도와주거나 후공정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삼성전자는 이를 위해 협업 생태계인 ‘SAFE’를 구축해 전자설계자동화(EDA), 설계자산(IP) 등 다양한 전문 기업과 손잡고 있다. ARM, 지멘스, 시놉시스 등의 회사가 SAFE 멤버다. 올해는 EDA 업체 엑스피딕 등 6개사가 새로 합류했다.
이날 IBM이 발표한 VTFET(VT펫) 기술도 협업의 결과물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IBM 올버니 나노테크 연구단지에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파견 가는 방식으로 공동 연구를 수행해 개발해냈다. 구글의 스마트폰 ‘텍셀 6’에 들어간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텐서’가 또 다른 예다. 삼성전자는 구글이 AP를 개발할 때부터 협업해 파운드리까지 수주했다.
한편 삼성전자 관계자는 “수주와 관련된 정보는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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