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도 쉿?…美기업 리스크 된 '비밀유지 조항'

입력 2021-12-16 11:29   수정 2021-12-17 01:15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기업) 사이에서 ‘직원들의 말할 권리’가 새로운 경영 리스크로 떠오르고 있다. 기업의 고용계약서에 명시된 비밀유지조항(NDA)과 관련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투자자들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어서다. 이들은 주주제안 등을 통해 비밀유지조항이 후진적 근무환경을 은폐하는 용도로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내년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빅테크에 접수된 일곱 건의 주주제안에 “고용계약상 비밀유지조항의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기업의 독점적 기술 정보 등에 대해 외부 유출을 금지하는 목적으로 쓰이는 비밀유지조항이 회사의 나쁜 근무환경 등 문제점을 은폐하는 용도로 악용된다는 이유에서다.

대상 기업에는 알파벳(구글 모회사), 아마존, 메타(옛 페이스북), IBM, 세일즈포스, 트위터, 에시 등이 포함됐다. 이들 기업 투자자들은 이미지 검색 공유 플랫폼 기업 핀터레스트 사례를 주주제안의 배경으로 설명했다. 핀터레스트에서는 수년 동안 성차별 등이 만연했지만 사측이 비밀유지조항을 들어 직원들의 공론화를 묵살했던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핀터레스트는 지난해 4월 프랑수아 브로어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가 “중요 회의에서 배제당하고 남성 동료들보다 적은 급여를 받았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그를 해고했다. 브로어는 소송을 제기했고, 핀터레스트는 작년 말 2250만달러(약 226억원)를 주고 합의해야 했다.

이번 주주제안을 주도한 인물도 전직 핀터레스트 직원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이민 2세대인 이페오마 오조마는 구글 등을 거쳐 2018년 핀터레스트에 입사해 약 2년간 근무했다. 그는 핀터레스트에서 인종 차별, 폭언 문제 등을 겪은 뒤 회사를 관뒀다. 사측이 비밀유지조항을 악용해 함구령 문화를 조성하고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오조마는 코니 레이바 상원의원(민주당)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의회에 ‘더 이상 침묵 금지법(Silenced No More Act)’을 공동 발의했다. 근로자가 입사할 때 고용계약서상 비밀유지조항에 서명했더라도 사내 성희롱과 차별 등을 공론화하는 것은 보호해야 한다는 법안이다. 지난 10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주지사가 서명해 최종 법제화된 이 법안은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최근 애플의 비밀유지 문화가 도마에 올랐던 사례도 지적됐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지난달 한 전직 애플 직원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해야 했을 때 발설이 제한됐다”며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조사를 의뢰했다. 애플은 “고용계약서에 직장 내 문화에 대해 명시적인 비밀유지조항이 없다”고 항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캘리포니아법 시행을 계기로 실리콘밸리 빅테크기업을 겨냥한 이 같은 주주제안은 가속화할 전망이다. FT는 “기업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폭넓은 주주제안 움직임에 시달리기 시작했지만 비밀유지조항에 대한 변경 요구는 새로운 추세로 자리잡을 것”으로 내다봤다.

컨설팅기업 사운드보드거버넌스의 더글러스 치아 설립자는 “블랙록 같은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직장 권리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만큼 이런 주주제안은 상당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조마 등은 주주제안서에 “캘리포니아주가 (내년부터) 고용계약상의 특정 비밀유지조항을 금지하기 시작했으니 경영진은 캘리포니아법의 적용 범위를 더 폭넓게 해달라”는 요구도 담았다. 그는 마켓워치와의 인터뷰에서 “캘리포니아주 밖의 근로자들도 보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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