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사용을 강제하기 위해 시전의 부상대고(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하는 상인)나 다양한 공장 가운데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에게 장 100대, 가산 몰수 등을 규정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일상적인 두승 이하 소액 거래에도 반드시 동전만 쓰도록 했다.
하지만 동전 사용이 공포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425년 5월에 시중의 백성들은 동전 이용을 기피했다. 동전가도 하락해 미 1승에 전 3문으로 거래되는 지경이 됐다. 최초 화폐 발행 3개월 만에 화폐가치가 3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동전 가격이 하락하면서 동전을 녹여 동그릇을 제작하는 자도 늘었다.
원활한 동전 유통을 위한 구리 채굴 양도 부족했다. 동전 통용이 결정된 뒤 전국적으로 동광산 개발이 추진됐지만 산출량이 미미했다. 1427년(세종 9)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3개월간 채굴한 동의 양이 300근에 불과했던 반면 이듬해 정월 일본 사신이 한번에 가져온 동철은 2만8000근에 달했다.
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도 건국 초기부터 주요 국정 과제였다. 건국과 함께 조선 정부는 도성인 한양에 관에서 허가를 낸 사업인 시전을 뒀다. 이를 통해 도성 상업과 한양을 거점으로 진행되는 전국의 교환 과정을 통제하고 관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종로 1~3가와 남대문로 1가 일대에 시전을 조성해 옛 도읍인 개경의 시전상인과 부상대고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대상인인 이들을 매개로 도성과 전국의 상업을 파악해 관장하고자 한 조치였다.
1420년(세종 2)에는 시전에 입주하지 않고 물가를 조정하는 도성의 공상(간단한 수공품을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판매하던 상인)들을 판매 물종에 따라 모두 시전에 분산 편입시켰다.
시장 거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부 개입도 지속적으로 강화됐다. 도성 내 시장에서 이른바 ‘간활범법자’를 단속하는 조처가 줄곧 이어졌다. 국초부터 도성상업 전담 규찰기구인 ‘경시서’를 두기도 했다. 1437년(세종 19) 2월 의정부는 “쌀을 파는 자가 이익을 취하려고 서로 다투며 사람을 속여서 사는 데는 큰 말과 큰 되를 쓰고, 파는 데는 작은 말과 되를 쓴다”며 “혹은 모래와 돌을 섞어 팔고서는 곧 숨긴다”고 중점 단속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정부가 시전과 도성상업계의 도량형 사기, 물가 조종, 강제로 물건을 떠넘기는 행위 등에 대해 ‘금란(禁亂)’을 명목으로 단속 위주로 처벌했던 것이다.
지방 상인인 행상의 활동에도 정부가 감시의 눈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업 상인인 행상을 국가가 파악해 한성부와 소속 주현에 각각 적(籍)을 비치해 등록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가가 전면에 나서 제조업과 상업을 통제한 조선은 왕조시대 내내 정책 의도가 비교적 충실하게 달성됐다. 그 결과는 저조한 상업경제 발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2. 조선 초기 화폐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뭘까.
3. 조선 초기 정부가 시장과 가격을 통제하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 학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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