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영 박사의 레전드 일화는 1968년 덴마크로 유학을 간 일이다. 건국대 야간부를 졸업한 뒤 가난한 청년들을 가르치던 저자는 《새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가슴이 뛰었다. 가을부터 봄까지 8개월간 햇볕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기후를 딛고 농업 부국이 된 덴마크처럼 우리 농촌도 잘 살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국왕의 주소를 알 수 없어 ‘프레드릭 9세 국왕 귀하,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써서 보냈는데 그 편지가 기적적으로 국왕에게 전달됐고, 덴마크 외무부에서 초청 편지가 왔다. 꿈 같은 일이 벌어져 1968년 7월 27일 비행기에 올랐다. 덴마크에 도착하는 즉시 언어를 익히기 위해 ‘1주일에 70문장씩 외우기’ 목표를 세웠다. 길을 걸으면서도 중얼거리고 누구를 만나든 말을 걸어 6개월 만에 덴마크 말을 익혔다.
대학에 다니면서 전국을 돌며 농촌의 선진기법을 익힌 그는 유럽 전역의 문화와 사회를 시찰하며 연구할 기회까지 스스로 마련했다. 외무부 국장을 끈질기게 설득해 받은 특별예산 3만달러로 유럽을 여행한 것이다. 그를 눈여겨본 이스라엘 정부에서 초청장이 와서 6개월간 농촌 개발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다.
1970년 봄에 귀국한 그는 어디든 달려가 농촌 발전에 대해 강연하고 방송에도 출연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 선 그는 덴마크와 이스라엘이 최고의 선진 복지국가가 된 과정을 설명한 뒤 우리나라 농촌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정말 고맙소”라고 말했고 저자는 그날로 청와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래서 태동한 것이 ‘새마을운동’이고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은 세계 개발도상국의 성장모델이 되고 있다.
한 번도 소풍을 가본 적 없는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매일 일기를 쓰고, 금전출납부를 반드시 기록했다. 수입 중 일부를 떼내어 불우이웃을 돕고 매일 한 가지 이상 남을 돕는 선행까지 실천했다.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이스라엘 유학을 떠나 어려운 히브리어를 6개월 만에 익힌 그는 박사 학위를 딴 뒤 이스라엘 최고 명문 벤구리온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건국대 교수와 부총장을 지냈다.
중학교 때 ‘일생의 설계도’를 작성한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바지가 낡아 엉덩이가 보이는 상황에서도 가난을 탓하기보다 꿈을 향해 달렸던 류태영 박사는 “가정환경이나 사회정서,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의 흐름, 그런 것들에 용감하게 도전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숙명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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