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업계 발전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이 고문은 지난 14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됐다. 현재까지 선정된 77인 가운데 최연소 유공자다.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이 고문은 “혼자였다면 절대로 국산 엔진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동고동락하며 함께 기술을 개발했던 동료들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고문은 “지금도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국산 엔진을 개발해달라’며 현대자동차에 합류하라고 요청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1979년 미국 뉴욕주립대로 유학해 제너럴모터스에 입사했던 그는 1984년 현대차로 이직해 국산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현대차는 미쓰비시 등과 기술을 제휴해 엔진·변속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 고문은 “자체 엔진 개발이 무척 어려워 보였고, 이직하면 급여마저 줄어들어서 처음엔 거절했다”며 “하지만 정 회장이 ‘전권을 주겠다’며 몇 달이나 설득해 결국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개발 과정은 ‘맨땅에 헤딩’의 연속이었다. 실린더·피스톤과 같은 부품은 물론 엔진 제작에 사용될 철강까지 새로 만들어야 했다. 사내에서 미쓰비시와의 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 고문은 “그땐 ‘회사에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사기꾼’이라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정 회장만큼은 나를 끝까지 믿어줬다”며 “엔진을 대중에 공개하고 난 다음 날엔 그동안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인지 얼굴에 마비가 와 몇 달간 고생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나중에는 우리가 개발한 세타원엔진 기술을 역으로 미쓰비시에 전수해주면서 선생과 제자가 바뀌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내 천직이 엔지니어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차를 떠나 2014년 두산그룹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합류하면서 로봇, 드론 등 그룹 주요 사업의 기술 혁신 업무를 맡았다.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지금도 젊은 엔지니어들과 마주하고 기술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 고문은 후배들에게는 “실패를 두려워 말고 끈질기게 도전하고 덤벼들라”며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첫 국산 엔진을 개발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뛰어난 엔지니어도 좋지만 후배 육성을 위해 열심히 애쓴 선배로 더 기억되고 싶다”고 답했다.
이 고문은 “젊은 엔지니어들이 나라의 기둥인 만큼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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