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장애 밝히고 문신한 35세 좌파, 칠레 최연소 대통령 당선

입력 2021-12-20 15:56   수정 2022-01-19 00:01


학생운동가 출신인 좌파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칠레의 경제정책이 좌편향할 전망이다. 한편 올해 35세인 보리치는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19일(현지시간)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좌파연합 ‘존엄성을 지지한다’ 소속 후보인 보리치는 55.9%를 득표하며 당선을 확정지었다. 경쟁자인 극우 성향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의 득표율(44.1%)보다 11%포인트 이상 앞섰다. 1990년 칠레 민주화 이후 중도좌파가 집권한 적은 있지만 공산당까지 아우르는 좌파의 대선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결선 투표율은 약 56%로 의무투표제가 폐지된 2012년 이후 가장 높았다. 중도우파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보리치는 내년 3월 취임하게 된다.

보리치는 유럽 크로아티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남부 소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자랐다. 그는 칠레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2011년 대학 등록금 철폐를 비롯한 교육개혁을 요구한 학생시위를 주도하며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2013년에는 27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보리치는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 있는 최저 연령 조건을 충족한 이번 해에 바로 대선에 도전, 승리를 거두게 됐다. 보리치는 강박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문신을 하는 등 젊고 자유로운 정치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칠레의 불평등 문제가 보리치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정권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을 채택했다. 그 결과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의 부국 중 하나가 됐지만 빈부격차도 커졌다.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진 1990년 이후 집권한 중도 정권 치하에서도 인플레이션과 공공서비스 부족 문제가 불거졌다. 불평등에 대한 칠레 국민들의 불만은 2019년 시위로 터져나왔다. 수도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빈부격차 항의 시위가 수개월 동안 이어졌고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 사태를 계기로 도시에 거주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국민 상당수가 좌파 지지 세력으로 돌아서며 보리치를 중심으로 한 정권교체의 동력이 됐다.

보리치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증세 및 공공지출 확대, 연금·의료·교육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여성과 원주민, 성적소수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정책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올 초에는 “과거에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앞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보리치가 환경보호를 위해 광산사업 등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드러내면서 원자재 시장에도 파급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칠레는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 중 하나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좌파가 정권을 잡은 현상을 일컫는 ‘핑크타이드’가 되살아났다는 평가도 나온다. 올해에는 페루와 온두라스, 지난해에는 볼리비아에서 좌파가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2018년에는 멕시코, 2019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좌파가 집권했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 중 우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곳은 브라질과 콜롬비아 정도다.

한편 보리치의 집권 후 행보가 험난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단 짧은 정치경력이 약점으로 꼽힌다. 칠레 하원에만 21개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피노체트 정권 시절 제정된 현행 헌법을 페기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내년 국민투표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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