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일본 내 한류 바람을 타고 한국 막걸리 수출이 크게 늘었지만 내수를 고집해온 지평주조는 그저 지역 막걸리 양조장에 불과했다. 직원 3명에 매출 2억원. 초라한 규모였다. 그런데 아들이 덜컥 양조장을 맡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는 “막걸리는 사양산업”이라며 반대했지만 아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로부터 12년 뒤 지평주조는 매출 400억원(올해 예상치) 규모의 국내 2위 막걸리업체로 폭풍성장했다. 10여 년 만에 200배 성장하는 신화를 쓴 주인공은 김기환 지평주조 대표(39)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 있는 지평 양조장은 1925년 세워진 한국 최고(最古) 양조장 중 하나다. 6·25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지평리 전투를 이끈 유엔군의 작전기지로 활용됐고, MBC 드라마 ‘아들과 딸’의 배경으로 나오기도 한 100년 가까운 역사가 깃든 곳이다. 1대 사장인 고(故) 이종환 씨가 설립한 지평주조를 1960년 김기환 대표의 할아버지 김교십 씨가 인수했다. 3대인 김동교 대표에 이어 2010년부터 4대 김기환 대표가 경영을 맡았다.
김 대표가 회사를 맡은 지난 10년 사이 지평주조는 국내 막걸리업계의 신흥 강자로 성장했다. 2009년 2억원이던 매출은 2018년 166억원, 2019년 230억원, 지난해 308억원으로 증가했다. 올해 예상 매출은 전년 대비 30% 많은 400억원이다. 1위 장수막걸리에 이어 2위 자리를 확고히 굳혔다는 평가다.
아버지인 김동교 대표는 양조장을 넘겨주며 두 가지를 당부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니 명성에 먹칠하지 마라’ ‘수익에 앞서 품질을 최우선으로 해라’. 지평은 수출을 위해 멸균하면 생막걸리 맛과 품질이 손상된다는 이유로 한류 붐을 탄 막걸리 수출에도 편승하지 않았다. 김기환 대표는 막걸리 발효 환경을 관리하기 위해 양조장 옆 3평짜리 쪽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꾀했다. 2015년 막걸리 알코올 도수를 기존 6%에서 5%로 낮췄다. 기존 지평막걸리 팬을 잃을 위험이 있었지만 연구 끝에 지평막걸리 맛에 알맞은 최적의 도수는 5%란 결론을 내렸다. 도수를 낮춘 막걸리에 젊은 층이 열광했다. 알코올 도수가 4~5%인 맥주에 익숙한 2030 입맛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에는 샴페인이 인기를 끌자 스파클링 막걸리 ‘지평 이랑이랑’을 선보였다. 2019년엔 1925년부터 막걸리를 빚어온 지평주조의 첫 레시피와 주조법을 복원해 ‘지평 일구이오’를 출시하는 등 트렌드에 맞춰 제품을 다양화했다. 올해 7월에는 SPC그룹이 운영하는 쉐이크쉑과 협업해 ‘막걸리쉐이크’를 내놓았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100년 역사의 스토리를 입힌 고급 이미지를 구축해 장수막걸리보다는 비싸지만 기존 고급 지역 막걸리보다는 낮게 가격을 책정한 전략도 가성비를 중시하는 MZ세대를 파고드는 데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유통망을 관리할 때는 ‘부자가 되고 싶으면 남을 부자가 되게 하라’는 철학 아래 상생 전략을 썼다. 지평주조는 판매대리점에 영업전략을 믿고 맡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출 할당량을 못 올리면 대리점 권한을 빼앗는 악행도 없앴다. 편의점 대형마트 골프장 등으로 유통 채널을 확대해 전국 막걸리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김 대표는 “100년간 지켜온 맛과 역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대 감성에 맞춰 끊임없이 혁신을 꾀하는 것이 전통주가 도약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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