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중에 사업주로부터 "정리해고를 한다면 당신이 해고 1순위"라는 말을 듣고 20분만에 쓰러져 사망했다면, 별다른 과로 정황이 없어도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5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제13부는 사망한 근로자 A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청구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부지급처분 취소 소송에서 공단의 부지급 처분을 취소하고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다.
고령의 근로자 A는 2015년부터 이 변리사 사무실에서 일해 왔으며, 변리사인 사업주 B와 고객 수수료 절감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어 왔다. 고객 요청이 있다면 수수료를 깎아주고서라도 거래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A와 달리 계약된 수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B 사이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B는 회의나 회식시간에도 이를 종종 지적했고, 평소에도 "매출이 부진하다.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나이든 A는 더 이상 다니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A가 쓰러진 당일 회의에서도 이런 갈등은 이어졌다. 매출부진으로 심기가 좋지 않았던 B는 A를 향해 "은퇴할 나이에 여기서 일하고 있는 것을 감사해라"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나이가 가장 많은 A가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분위기가 불편해진 가운데 유독 얼굴이 상기됐던 A는 결국 회의가 끝난지 20분만에 쓰러졌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조사 결과 A가 특별히 1주 평균 52시간을 초과하는 등 과로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법원은 A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B조차도 A가 퇴근 후에도 집에서 고민하고 학습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며 "여느 특허명세서와 달리 서류 번역 업무, 도면 작성 업무, 수수료 등 비용처리 업무까지 도맡아 업무 부담이 가중된 상황이었다"고 판시했다.
이어 "내성적인 A가 수수료 할인을 요청하는 고객들을 응대하는데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고, 이를 반대하는 사업주의 거듭된 질책과 고객 사이에서 정신적 고통이 심화됐을 것"이라며 "그전까지 실적이 부진하다는 불만을 표출하는 데 그쳤던 것과는 달리 사업주의 해고 발언은 A에게는 실직의 위험을 느낄만한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근거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상병의 전적인 원인은 아니어도 최소한 기저질환을 급격히 악화시켜 병의 발생을 앞당겼을 것"이라고 판단해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5월 서울행정법원은 방위사업청 산하의 한 공공기관에서 22년간 연구개발을 해오다 사망한 C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청구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C는 연구개발만 하다가 행정 업무를 맡게 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새로운 일을 맡은지 10개월 만에 주말 아침 산행 중 사망했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조사 결과 C의 주당 평균 업무시간은 41시간 수준이었다. 발병 전 12주 동안 평균 업무시간이 주52시간을 넘어야 과로로 인정하는 공단은 거부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법원 판단을 달랐다. 재판부는 "공단이 기준으로 삼는 고시는 고려사항에 불과하다"며 "조직 재구조 업무를 맡으면서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중됐고 이로 인해 약간의 신체적 부담만으로 급성 심근경색이 발병하는데 영향을 줬다"고 판단해 업무상 재해라고 봤다.
지난 10월엔 서울행정법원이 30대 여성 근로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취소소송에서 근로자의 손을 들어준 사건도 있었다.
부서 이동 이후 출근준비를 하다 쓰러진 D는 뇌경색 진단을 받고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공단이 컴퓨터 로그기록을 근거로 "평균 업무시간이 주당 38시간"이라며 불승인처분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부서 이동으로 업무량이 급증하고 외국어 공부를 해야 하는 등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며 "뇌경색과 직장 스트레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에는 한 노조위원장 E가 회사의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진행을 이를 막지 못했다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사건에서도 법원은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동호회에서 축구를 하던 중 사망했고, 근무시간은 명확하게 산정되지 않은 탓에 공단이 유족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청구를 기각했지만, 서울행정법원은 다르게 판단하고 유족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과로 정황이 없는 점이 명확하게 밝혀진 경우여도, 급격한 업무환경 변화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있었고 그로 인해 질환이 발생했다면 업무와 재해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해 산재로 인정하는 추세다. 심지어 기저질환이 있다고 해도,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근로자의 기저 질환을 평균 이상의 속도로 진척 시켰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을 해주는 것이 법원의 입장이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은 근로자들은 심근경색, 뇌경색 등 뇌심혈관계 질환에 취약한 편이기에, 법원도 뇌심혈관계 질환이 발생한 경우 업무상 스트레스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재해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 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을 초과하면 과로와 업무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판단하고, 52시간 이상 60시간 미만이면 업무부담 가중요인을 살펴본다. 공단은 근무시간을 산재인정에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반면, 최근 법원은 이런 고용부 고시는 '참고 사항'에 불과하며 특별한 스트레스 요인이 있는 경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경향이다.
한편 지속적인 괴롭힘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발생했다면 직장 내 괴롭힘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따르면 올해 10월부터 사용자(사용자의 친족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이 해당 사업장의 근로자인 경우 포함)가 직장내 괴롭힘을 한 경우에도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된다. 그 외에도 사용자가 직장내 괴롭힘 행위의 조사, 피해근로자 보호, 가해 근로자 징계 등의 조치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는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규정이 신설됐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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