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에도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 인식이 진실’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각종 의혹들에 대한 검증 문제에서 더욱 그렇다. 대통령 선거철만 다가오면 후보 본인은 물론 가족들과 친인척을 둘러싼 온갖 의혹들이 터져 나온다. 후보 캠프마다 상대 후보의 약점을 들춰내기 위한 전담 팀까지 가동하고 탈탈 털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니 그럴 수밖에 없다. 정책 경쟁은 말뿐 후보의 뒤를 캐는 것이 선거에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은 뒷전이고 일단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선거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 하는 게 보통이다. 국민은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제기된 의혹 자체만으로 사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 후보를 향해 누가 더 쎈 의혹을 제기하느냐가 선거판을 좌우하는 퇴행적 행태는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의혹들 가운데 뚜렷하게 해명된 것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공방만 벌이다 선거가 끝나곤 했다.
역대 대선에서 의혹 제기와 난타전이 대선판을 뒤흔든 사례는 많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비리 의혹,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장인 좌익 논란, 2007년 이명박 후보의 BBK와 도곡동 땅 논란, 2012년 박근혜 후보의 최태민 목사 의혹 등이 대표적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관계 없이 국민은 의혹 자체를 사실로 여긴 것이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해 그 이유를 불문하고 특권층의 특혜 정도로 본 것이 국민의 정서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의혹을 반박하는 데 급급했고 위법 여부에 관계 없이 진솔한 사과로 국민 정서를 어루만지는 데는 인색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물론 정공법도 있다. 사과 못지않게 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노무현 후보의 화법이 대표적이다. 노 후보는 2002년 4월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장인의 좌익 활동이 논란이 되자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말로 여론을 반전시켰다. 하지만 모든 선거에서 이런 사례를 적용하기는 힘들다. 노 후보의 사례는 개인 비리나 의혹 차원이 아닌 분단사의 아픔이라는 특수한 경우로 볼 수 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도 검증 지뢰밭에 빠진 형국이다. 여야 주요 후보들이 잇단 의혹들로 코너에 몰리고 있다. 여야는 상대당 후보를 둘러싼 의혹들을 두고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친형 강제 입원, 형수 욕설 파문, 과거 음주 운전 전력, ‘교제 살인’ 조카 변론, 여배우와의 스캔들, 장남 불법 도박, 대장동 개발 의혹 등이 검증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대장동 개발과 관련한 부산저축은행 부실 수사, 부인 김건희 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 수원여대 등에서 시간 강사 또는 겸임 교수 지원 시 학력과 경력, 수상 내용 허위 기재 의혹 등을 받고 있다. 후보들은 연신 사과와 해명을 하느라 바쁘고 여야는 제 눈의 들보는 못 본 체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데 급급하다. 정책과 비전 대결은 뒷전이다.
의혹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대별된다. 이 후보는 형수 욕설, 장남 불법 도박, 과거 음주 운전 전력, 조카 변론 등 확인된 의혹에 대해서는 곧바로 사과했다. 대장동 개발 등 뚜렷하게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강력한 부인으로 대응하고 있다. 즉각 사과는 좋은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인하고 있는 다른 건들의 경우 만약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치명상을 입을 위험성이 있다.
윤 후보는 사과 타이밍을 놓쳤다는 지적이 많다.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 파장이 커지자 뒤늦게 사과하는 것은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마지못해 사과하는 척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후보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혹독한 검증 과정을 넘어서는 길은 있다. 과거보다 그 후보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이 훨씬 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내 주머니를 더 채워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후보가 있다면 그 후보에게 제기되는 웬만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표를 줄 것이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가 그랬다. ‘747(연 7% 성장, 소득 4만 달러, 7대 강국 달성)’로 대표되는 이 후보의 경제 대통령 이미지는 BBK, 도곡동 땅, 다스 소유주 의혹 등 그를 둘러싼 온갖 검증의 문턱을 압도했다.
하지만 이 후보와 윤 후보 모두 이런 의혹들을 압도하고 유권자들의 욕구를 충족할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후보는 비전 제시는커녕 자신이 내세웠던 주요 정책들에 대해 오락가락하면서 혼선만 주고 있다. 물론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한다면 뒤늦게라도 공약과 정책을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그의 발언들을 보면 한다는 것인지, 만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주장해 온 기본소득에 대해 “국민이 반대해 제 임기 안에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다가 철회하자는 것은 아니고 국민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토지 보유 상위 10%에 못 들면서 반대하는 것은 악성 언론과 부패 정치 세력에 놀아나는 바보 짓”이라고 한 국토보유세에 대해서도 “국민이 반대하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이 역시 철회는 아니라고 했다. 대학 안 가는 청년들에게 해외 여행비 1000만원 지원, 한 지역에서 개업할 수 있는 음식점의 총량을 제한하는 ‘음식점 허가 총량제’, ‘주4일 근무제’도 불쑥 꺼냈다가 반대 여론이 적지 않자 이 역시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흐지부지했다.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대선 후보와 그 가족들에게 제기되는 의혹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도 필요하다. 하지만 국민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악화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미·중 충돌로 인한 대외 불안, 글로벌 공급망 충격, 폭등한 집값·전셋값, 한반도를 둘러싼 위중한 안보 등 숱한 난제들을 풀 능력이 있는 후보다. 대통령 본연의 임무에 누가 더 적합한지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홍영식 논설위원 겸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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