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 "나는 '문장 노동자'…詩 속에 유토피아 세웠죠"

입력 2021-12-27 17:53   수정 2021-12-28 01:39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대추 한 알’ 중)

열다섯 살 때 처음 시를 썼던 장석주 시인(66·사진)의 50여 년 시 여정이 대표작 ‘대추 한 알’처럼 여물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그의 절판 시집 9권 가운데서 고른 시들을 엮은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난다)다. 시인이자 유명 문학 편집자인 김민정 난다출판사 대표와 함께 6개월에 걸쳐 꼼꼼히 고른 시를 엮은 이 시집은 출간 보름여 만에 2쇄에 들어갔다. 경기 파주출판단지에서 최근 장 시인을 만났다.

“대략 1985년부터 25년간 가장 활발하게 시를 썼던 시기의 작품이 실린 대표시 모음집입니다. 옛날에 썼던 시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내 시에 이렇게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나 당황했어요. 배고픔은 부재와 결핍의 표상인데 인간에게 가장 큰 결핍은 실존적 불안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잖아요. 그 공허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요.”

부재와 결핍은 승화해 그리움이 된다. 시선집 1부 제목이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인 이유다. 장 시인은 “시 속에 일종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그곳으로 도피하려 했다”며 “현실 세계와 이데아 세계 사이에서 생기는 분열과 긴장, 상처와 고통이 내 시의 주제였다”고 설명했다. 시선집에 첫 번째 시로 실린 ‘그리운 나라’가 그런 예다. 해남 대흥사에서 감동했던 그는 그곳을 ‘돌아가야 할 유토피아’로 치환하고 강한 그리움을 표한다.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그리운 나라’ 중)

장 시인은 열네 살 때 처음 시를 접하고 이듬해 ‘겨울’이란 시를 써서 청소년 문예지 학원(學園)에 발표했다. 스무 살 때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스물넷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각각 시와 문학평론으로 다시 등단했다. 이후 소설가, 평론가, 인문학 작가, 편집자, 출판인 등 다방면으로 재능을 뽐냈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시인으로 돌아왔다.

시는 그에게 매우 각별하다. 시를 쓰는 것은 자기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시를 쓸 때면 나와 세계 사이의 괴리감이 사라집니다. 이를 통해 얻는 충만감과 보람이 시를 계속 쓰게 하는 힘이죠.” 유명세나 저작권료 등은 아주 작은 보상일 뿐이다.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시선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66편의 시 외에 아포리즘 형태의 시론(詩論)을 138개 구절로 책에 담았다. 여기서 그는 “사자 새끼가 사자 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시”라고 썼다. “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라고도 했다.

그는 “소설도, 비평도, 에세이도 모두 언어를 매개로 하지만 시는 조금 더 독특하다”고 말했다. “시는 언어 너머를 꿈꿔요. 언어를 버리고, 지우고, 응축하죠. 소설이 책 한 권으로 해야 할 이야기를 시는 한 줄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사물이나, 사건, 세계를 새롭게 본다. 그는 “시를 쓰고, 시를 안다는 것은 결국 우주를 아는 것과 통한다”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을 ‘문장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들고 새벽 일찍 일어나 날마다 글을 쓴다. 출간한 책이 100권을 넘는다. 30년째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루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었지만 꾸준한 글쓰기는 여전하다. 지금은 에세이 쓰는 법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신작 시집도 낼 계획이다. 니체에 관한 책도 준비 중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은 결국 시인이다.

“살아있는 동안 솔직하게 자기 삶을 시로 표현한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피로 시를 쓴 시인, 그렇게 기억된다면 행복하겠죠.”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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