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한 정보력의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고백했다. 김정은에 대해 아는 게 변변치 않다고…. 통통한 젖살과 올백 헤어스타일, 도저히 감출 길이 없는 풍성한 허리둘레와 볼품없는 패션 탓에 뚱뚱보 애송이로 평가되던 인물. 하지만 집권 몇 주 만에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란 일각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대 실세들을 모조리 숙청, 처형, 강등해 절대권력을 쥐었고, 세계를 향해 핵·미사일 도박을 단행한 북한의 최고 권력자를 ‘리틀 로켓맨’ ‘미친 뚱보’로 희화화하는 게 올바른 일일까.
《비커밍 김정은》은 한국 이름 박정현보다는 ‘정 박’이란 이름이 익숙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가 지난해 4월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로 있을 때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CIA와 미 국가정보국(DNI)에서 10여 년간 김정은을 집중 연구한 ‘김정은 권위자’다. 책은 소년시절부터 베트남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까지 김정은 일대기는 물론 김일성 김정일 고용희 장성택 김정철 김정남 이설주 등 김정은과 관련한 인물을 두루 다룬다. 김정은은 일부 인용문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직함 없이 이름 석 자로만 불린다.
북한 최고 권력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북한 정권의 고립성·불투명성에다 강력한 방첩 활동 등이 겹쳐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북한 정권 주요 지도층의 생일과 김씨 일가의 행방 등 아주 일상적인 정보조차 입수하고 검증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책에선 CIA만이 확보한 특수 정보, 다른 곳에선 접할 수 없는 비밀은 찾아볼 수 없다. 언론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정보로 재구성됐다.
하지만 막연한 가십의 안개를 걷어내고, 객관적으로 김정은의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책의 진가가 드러난다. 낭만적인 감상, 허황한 기대가 인물 분석에 끼어들 틈은 없다. 저자에게 김정은은 결코 망나니나 미치광이가 아니다. 그는 신기술(사이버 공격)과 재래식 기술(생화학 무기)을 사용해 자신의 강압 수단을 갈고 닦으면서 북한의 위상을 ‘잠재적으로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핵무장 국가’로 끌어올린 ‘위험인물’이다.
김정은은 타고난 유연성과 적응력을 지닌, 공격적이지만 무모하지는 않은 만만치 않은 상대다. 무엇보다 ‘스스로 통제하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차를 마시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말을 경청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옆에 앉아 기자들의 질문에 능숙하게 답하면서 탄도미사일과 핵 개발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돌리고 국제사회의 제재 이행 압력을 약화했다. 페이스북 활동을 열심히 하던 이복형 김정남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TV쇼’를 벌이듯 백주에 암살했다.
김정은이 추구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핵무기의 주된 목적은 체제 생존을 위한 억지력과 국제적 지위 확보다. 평화보다는 갈등, 교역 확대보다는 자립에 그의 시선은 머문다. 자신의 생존과 김씨 일가의 영속을 위해 비핵화가 아니라 핵무기 보유에 손이 갈 수밖에 없다.
‘협상’과 ‘타협’도 김정은의 사전엔 없다. 2012년 11월 시진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켓 발사를 강행했고, 베이징에 파견했던 모란봉악단을 철수시켰다. 중국의 요구에 굴복하거나, 자신의 여성 밴드가 모욕당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전 1년간은 트럼프 대통령의 수많은 조롱과 협박에 트럼프를 ‘늙다리 미치광이’로 부르며 맞대응하고 ‘집무실에 핵 버튼이 있다’고 강조하는 등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런 김정은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의 대응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한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김정은을 기다리던 문재인 대통령을 저자는 결혼식 들러리에 비유했다. 트럼프에게도 “‘부(富)’는 김정은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며 “김정은이 평양에 맥도날드를 유치하기 위해 핵을 포기하겠느냐”고 일갈한다.
저자는 김정은의 세계관을 형성한 북한 정권의 뿌리, 그의 성격과 야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핵화라는 목표를 훼손하는 정책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아직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맞닥뜨렸던 ‘진짜 위기’를 맛보지 않은 김정은이 제 뜻을 이루기 위해 도발적인 행동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고도 덧붙인다.
명시적으로 적진 않았지만 아마도 저자의 가장 엄중한 경고는 우리가 여전히 김정은을 잘 모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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