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31일 안건조정위원회를 열고 노동이사제 도입 방안을 담은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논의했다.
안건조정위는 정치권에서 이견이 있는 법안에 대해 여야 동수로 위원회를 구성해 최대 90일간 심의하는 제도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노동이사제 법안이 기재위 경제재정소위에서 국민의힘의 반대에 가로막혀 처리되지 않자 지난 8일 사회적경제기본법, 서비스산업발전법, 공공기관사회적가치실현법 등과 함께 안건조정위에 회부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22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방문한 자리에서 “야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을 통해서라도 해야 한다”며 여당 지도부에 노동이사제 도입을 주문했다.
국민의힘은 당초 야당 몫 안건조정위원 명단 제출을 거부하면서 안건조정위 개최에 반대했다. 하지만 전날 윤후덕 기재위원장과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기재위 야당 간사)이 만나 노동이사제 도입 법안을 안건조정위에서 처리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안건조정위원으로 민주당에서는 김주영·정일영·양경숙 의원, 국민의힘에서는 배준영·서일준 의원, 비교섭단체인 기본소득당에선 용혜인 의원이 선임됐다.
국민의힘이 반대 입장을 철회한 데는 대선을 앞두고 노동계 숙원사업인 노동이사제 도입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미 윤 후보는 지난 15일 한국노총과 만나 노동이사제 도입에 찬성 의사를 밝혔다.
류 의원은 “윤 후보가 노동이사제 도입에 긍정적인 입장을 이미 피력했기 때문에 민주당과 합의 처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국민의힘 안건조정위원들은 이날 회의엔 불참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노동이사제 법안 처리에 사실상 합의함에 따라 조만간 기재위 전체회의와 법제사법위원회 심의를 거쳐 오는 1월 11일 열리는 본회의에서 의결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경제계에서는 공공부문에 노동이사제가 도입될 경우 민간기업에 대한 도입 압력이 커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20일 국회를 찾아 송영길 민주당 대표와 김도읍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의장을 차례로 만나 노동이사제 도입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손 회장은 31일 신년사에서 2022년 기업 환경의 불안 요인으로 정치권에서 논의 중인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방안과 함께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도입을 꼽았다.
與 "야당서 아무 이유 없이 반대"…野 "기재부와 여당 입장차 때문"
국회는 31일 본회의를 열어 피선거권을 현행 25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 36개 안건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여야가 그동안 앞다퉈 처리하겠다고 약속한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았다.
당초 반도체특별법으로 불렸던 이 법안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지원 대상을 반도체 외 백신, 2차전지 등으로 확대할 수 있는 내용을 담으면서 명칭이 바뀌었다.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찾아가 “지속적인 성장 기반 마련을 위해 정부의 자원을 총동원하겠다”고 선언한 뒤 급물살을 탔다. 여야가 지난 2일 상임위에서 합의했지만 이후 법안 처리가 한 달째 늦어지고 있다.
법제사법위원회 여야 간사인 박주민, 장제원 의원이 지난 30일 본회의 안건으로 “여야 간 이견이 없는 미쟁점 법안을 우선 통과시키자”고 합의했지만 이 법안 처리는 미루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유를 두고선 양측의 말이 엇갈린다.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간사인) 장제원 의원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반대 의견은 전혀 없다”며 “법안 처리가 지연된 가장 큰 이유는 기획재정부와 민주당 측 입장차”라고 설명했다. 국가재정법, 공정거래법 일부 조항과 상충하는 것을 놓고 기재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부처들이 이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는 “정부 내 이견은 해소됐다”고 전했다.
양당 지도부는 오는 11일 본회의에서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다만 아직 법사위 일정과 논의 안건 등은 정해지지 않았다. 법사위 전체회의에 법안이 상정되더라도 일부 의원이 반대하면 다시 소위 심의 절차를 밟아야 할 수도 있다. 법사위 소속인 한 의원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라 어떤 돌발 변수가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 30일 열린 법사위 전체회의에서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통화기록 조회 논란이 불거지면서 법안 심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산업계는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법안 통과를 예상한 주요 기업들이 혜택을 보기 위해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미루고 있다”며 “공포 6개월 후 시행되는 법 조항 때문에 예정된 투자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대규모 제조업 투자에 따른 혜택이나 인허가 절차를 국제비교하면 한국이 미국, 대만 등 경쟁국보다 훨씬 뒤진다”며 “제도 개선이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들의 투자가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했다.
오형주/이동훈/좌동욱/전범진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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