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에 합류한 고려…900여척 전함에 1만여명 태우고 마산서 출항

입력 2022-01-10 10:00  


4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이 부여한 최대 과제는 남송의 멸망과 동방의 완전한 정복이었다. 일본열도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었다. 일부의 견해대로 남송을 공격할 때 외교적인 배후 역할 정도였다. 쿠빌라이칸은 1226년 고려에 일본 정벌 의도를 선언하고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68년 6월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신을 억류했다.

드디어 원정이 결정되고, 고려는 정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그믐까지 대선과 소선(小船)을 합쳐 900척을 건조했고, 물품도 모두 갖췄다. 변산반도 지역과 나주 천관산 지역의 목재를 활용해 전선 300척, 빠른 공격선 300척, 급수선 300척 등 900척을 불과 4개월 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의 조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고, 계속된 전쟁에도 국력과 노동력 등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음력 10월 3일. 원나라의 홀돈(忽敦·쿠둔)과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한군(蒙·漢軍) 2만5000명과 군사 8000명, 사공(梢工)·수로안내자(引海)·선원(水手) 6700명을 포함한 1만4700명의 고려군이 승선한 전함 900여 척이 마산 합포에서 출항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음력 10월 5일 대마도 남쪽에 상륙해서 고모다 해안(小茂田浜)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연합군은 이어 음력 10월 14일 늦은 오후 50여㎞ 떨어진 이끼섬에 상륙하고, 15일에 점령했다.



해안에서 평지로 20여㎞ 진군하면 일본의 서경이며 군사사령부인 다자이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은 돌연 퇴각해서 만 안에 정박시킨 선박으로 귀환했다. 이후 새벽녘에 폭풍이 몰아쳐 900척 가운데 무려 200여 척이나 침몰했다. 북서풍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현해탄은 파도가 매우 높고 거칠다.

쿠빌라이칸은 패전한 사실을 알지 못했고, 1275년부터 일본에 국서를 보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막부는 사신단을 계속 참수시켰다. 뒤늦게 실상을 파악한 쿠빌라이칸은 1276년 남송을 멸망시키자 이내 준비했고, 1280년 8월에 일본을 재차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원나라의 정책과 적극적인 참여로 입장을 바꾼 쿠빌라이의 사위인 충렬왕의 협조로 결국은 연합군이 편성됐다. 동로군은 군사 2만 명, 뱃사공·선원 등 1만7000명으로 구성된 고려군과 몽골군 1만 명으로 조직됐고, 전선은 900척이었다. 남송의 패잔병이 다수 포함된 강남군은 10만 명에 3500여 척의 전선이 참가했다.

1281년 음력 5월 3일 여몽연합군은 또다시 합포를 출발했다. 1차 때와 달리 대마도 전투에서는 실패했고, 이끼섬은 전염병까지 겹친 상황에서 고전하다가 점령했다. 그런데 5월 29일 이끼섬으로 가던 전선이 풍랑으로 행방불명됐다는 보고가 올라온 사실을 보면 해상 상황은 이미 안 좋았었다. 6월 보름 전에 이끼섬에서 합류할 강남군이 안 오자 내부에서는 선박 문제와 군량미 부족 등을 이류로 회군이 두 차례나 논의됐으나, 김방경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동로군은 음력 6월 6일에 독자적으로 하카타만을 공격했으나, 1차 때와 달리 방어체제를 보강한 일본의 저항에 부딪혀 내륙으로 진입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이키섬으로 돌아가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7월 2일 본토로 이동했다. 그리고 음력 7월 27일, 동로군은 강남군과 합류해 다카섬에 상륙해서 하카타만을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30일, 다카섬 근해에 태풍이 불어 닥쳤다. 놀랍다 못해 일본인들은 ‘가미가제(神風)’와 ‘기적’이라는 수사를 붙였지만, 자연은 두 번씩이나 일본을 도운 것이다.

좁은 만 안에 정박시켜 놓은 연합군의 4000척 배들은 충돌하고 침수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침몰, 표류했다. 무려 2000여 척이 침몰했다. 아비규환이었다. 강남군은 전선 3500척과 군사 10만여 명으로 참전했다가 때마침 태풍을 만나 모두 익사했으며 시체가 포구로 흘러 들어가 막혔다고 기록했다. 주로 강남군인 포로들은 거의 참살됐고, 극소수만이 노예가 됐다.

다행히 고려군은 피해가 가장 적었지만, 1만7029명 가운데 7592명이 귀환하지 못했다. 뜻밖의 패배를 당한 대원의 쿠빌라이는 3차 원정을 계획했으나, 결국 1294년 80세를 일기로 역사에서 퇴장했고, 자연스럽게 일본 원정은 중단됐다.
√ 기억해주세요
1274년 음력 10월 5일부터 10월 20일까지 고려군 1만4700명, 몽골·한군 2만5000명, 900여 척의 전선이 동원돼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어 1281년 음력 5월 21일부터 7월 7일까지 몽골군 3만 명, 고려군 2만7000명, 강남군 10만 명 등 4000여 척의 다국적군이 일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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