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가 코끼리를 이기는 창업 스토리를 생각했다.”
지난해 12월 초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신규 상장한 브라질 핀테크 기업 누뱅크의 최고경영자(CEO) 다비드 벨레스가 회사 설립 당시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설립 9년차인 누뱅크는 미국 증시에 데뷔한 첫날 종가 기준으로 시가총액 476억달러(약 57조2900억원)를 기록했다.
페트로브라스(정유업)와 발레(광산업)에 이어 브라질 기업으로는 시가총액 3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누뱅크는 브라질 최대 은행 이타우우니방쿠(시총 370억달러)를 단숨에 제치고 남미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금융기업에 올랐다.
이후 미국 스탠퍼드대에 진학해 공학을 전공했다. 2000년대 초반 불거진 실리콘밸리 창업 열풍에 뛰어들기 위해 선택한 전공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자신만의 창업 아이템을 찾지 못하던 벨레스는 졸업 후 모건스탠리에 들어가 투자은행(IB) 업무를 배웠다. 2년 뒤 벤처캐피털(VC)인 제너럴 애틀랜틱이 중남미 투자처를 늘릴 때 합류해 스타트업 투자 심사를 익혔다. 2010년엔 스탠퍼드대로 돌아가 MBA(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모두 창업하겠다는 일념으로 거친 과정이었다. 벨레스는 브라질 진출을 계획한 세쿼이아캐피털의 더글러스 레오네 CEO가 영입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잘렸다. 브라질엔 투자할 만한 스타트업이 없었던 데다 브라질 최고 대학인 상파울루대가 미래 창업가가 될 인재들인 컴퓨터과학 전공생을 달랑 42명만 배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오네가 브라질 진출 계획을 철회했기 때문이었다. 세쿼이아와 맺은 인연은 짧았지만 훗날 누뱅크를 세우고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벨레스는 곧바로 가족이 있는 코스타리카로 돌아갔다. 차분히 창업 아이템을 연구했다. VC에 근무할 때 배운 교훈들을 떠올렸다. 이때 만난 혁신적인 창업가들로부터 기술을 적극 활용해 ‘배부르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직원들’로 가득 찬 거대 조직을 슬림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브라질에서 제일 큰 산업이 뭔지 생각했다. 은행이었다. 가장 수익성이 큰 사업도 역시 은행이었다.
당시 브라질에선 이타우우니방쿠 외에 브라데스쿠, 산탄데르, 브라질 국영은행(방쿠 두 브라지우), 카이샤 등 5대 은행의 시장점유율이 84%에 달했다. 형편없는 고객 서비스에도 고금리와 터무니없이 비싼 수수료를 부과해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었다. 벨레스의 브라질 친구는 그에게 “브라질 은행은 구역질나. 언제나 이랬고 앞으로도 늘 이럴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남미 현지에서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투자할 만한 도박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코끼리를 이기고 성공하는 창업 스토리’를 믿는 실리콘밸리 투자자들만이 흔쾌히 자금을 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 중남미 투자자는 벨레스의 사업 구상을 듣고 “절대 불가능하다”며 “코끼리가 당신을 짓밟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벨레스는 오랜 멘토인 레오네를 찾아갔다. 레오네와 그의 VC 파트너들로부터 초기 자금으로 10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세쿼이아의 또 다른 파트너는 벨레스에게 “은행 근무 경력이 있는 공동창업자를 두라”고 조언했다. 이타우우니방쿠의 신용카드 부문에서 막 퇴사한 크리스티나 준퀘이라가 누뱅크에 합류했다. 핀테크 기술을 구축하기 위해 컴퓨터 능력자도 필요했다. 세쿼이아 재직 시절 알게 된 에드워드 위블을 초빙했다. ‘코끼리’ 이타우우니방쿠를 밀어낸 ‘개미’ 누뱅크의 시작이었다.
2014년 첫 금융상품으로 연간 수수료가 없고 모바일 앱으로 관리가 가능한 국제 신용카드를 출시했다. 2017년엔 캐시백 프로그램인 누뱅크 리워즈를 도입했다. 누뱅크의 간편하고 혜택 많은 서비스에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현재 고객 수는 중남미에서만 5000만 명에 육박한다.
점점 더 많은 투자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과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벅셔해서웨이도 누뱅크에 투자금을 댔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벨레스가 세운 누뱅크는 브라질 경제가 과거 호황에서 후퇴해 부패 스캔들, 코로나19로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더욱 빛났다”고 평가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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