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여 년이 지난 지금 태평양 전쟁은 미·중 기술패권 전쟁으로 재현되는 양상이다. 과거 전쟁의 발단이던 석유는 코로나 사태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이 된 반도체를 비롯해 배터리, 희귀광물, 의약품으로 대체됐다. 미국 주도의 자유시장경제 국가들이 ‘TVC(신뢰가치사슬) 동맹’을 이뤄 중국 고립화에 나선 것도 태평양 전쟁 발발 때와 비슷한 프레임이다. 산업·군사용으로 필수적인 기술에 대해 진영 내 배타적인 공급망을 구축해 상대방을 벼랑 끝으로 몰겠다는 점에서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전쟁이나 다름없다. 신흥 강대국의 부상에 기존 패권국이 공포를 느끼면 전쟁이 필연적이라는 ‘투키디데스 함정’이 또다시 들어맞는 꼴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바깥 세상 흐름에 민감한 일본의 DNA는 여전하다. 작년 10월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 신조 정권 시절 4년8개월을 재임한 전후 최장수 외무상 출신이다. 그가 자민당 정조회장이던 2020년 6월 경제 안보를 연구하는 ‘신국제질서창조전략본부’를 만들었다. 본부장이 기시다 내각의 경제정책을 설계한 아마리 아키라 전 자민당 간사장, 사무국장이 일본 첫 경제안보담당상에 임명된 고바야시 다카유키다. 일본이 올해 제정할 경제안전보장법의 핵심은 이 본부에서 작성한 70쪽짜리 ‘경제안전보장전략의 책정을 향해’ 보고서에 들어 있다.
고바야시 경제안보담당상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핵심 기술을 육성해 국제사회가 일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했다. 섬뜩하리만큼 무섭게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공급망 글로벌 정상회의에 한국을 초대한 것도 우리 반도체와 배터리 기업들의 경쟁력 덕이다. 그러나 미국 내 삼성전자와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들이 들어서고, 2030년까지 미국 전역의 40개 배터리 공장 완공 목표가 달성된 뒤에도 우리 몸값이 지금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중 틈바구니에 끼여 ‘안미경중(安美經中)’, ‘전략적 모호성’의 자세를 취해온 우리에게 회색지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선택지는 결국 하나뿐이다. 신기술과 핵심 기술로 세상이 우리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대선 후보들이 이런 고민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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