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첩보영화 시리즈 ‘007 스카이폴’에는 늙은 007 제임스 본드와 젊은 Q가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비밀리에 접선하는 장면이 나온다. 명화를 함께 바라보던 두 남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이 그림은 항상 울적함을 느끼게 하죠. 한때의 위대한 전함이 해체되기 위해 불명예스럽게 끌려가고 있으니…. 역시 시간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Q)
“젊다고 다 창조적이진 않아.”(007)
“잠옷 차림에 차를 마시면서 노트북으로 요원님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어요.”(Q)
Q의 말에는 눈부신 활약으로 스파이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제임스 본드도 한물간 신세로 전락해 현역에서 퇴장할 때가 됐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영국 출신의 샘 멘데스 감독이 세대교체의 상징물로 선택한 명화는 영국 국민화가인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걸작 ‘전함 테메레르’다. 영국인이 사랑하는 스파이 캐릭터 007 제임스 본드는 왜 그림 속 전함에 비유됐을까.
이 그림은 1839년 영국왕립아카데미 전시회에 발표된 이후 현재까지 애국심의 상징으로 영국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BBC 라디오 4의 투데이 프로그램이 주최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영국중앙은행(BOE)은 2020년 2월 20일부터 유통된 20파운드권의 지폐 모델로 터너의 자화상과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를 선정했다.
마크 카니 BOE 총재는 “터너의 그림은 혁신적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평생 이어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20파운드 새 지폐는 빛나고 다채로우며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터너와 그의 그림의 유산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물녘의 템스강을 배경으로 작은 증기 동력 예인선이 커다란 범선을 끌고 가는 장면을 그린 이 풍경화가 영국인들의 애국심을 상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왜 국민 그림으로 뽑혔을까.
그림 속 전함은 평범한 배가 아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전설적 군함 테메레르다.
98문의 함포로 무장한 테메레르는 당시 가장 큰 군함 중 하나로,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으로 평가받는 허레이쇼 넬슨 제독의 기함인 HMS빅토리(Victory)호를 위기에서 구하는 공적을 남겼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활약한 테메레르의 위대한 승리와 업적은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역사상 가장 거대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대영제국을 일구는 초석이 됐다. 나폴레옹 해군을 무찌른 테메레르는 군사적 용맹의 상징이 됐고 ‘파이팅 테메레르(Fighting Temeraire)’라는 이름도 얻었다.
테메레르의 영웅적인 활약상은 회화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인기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영광과 영국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테메레르도 세월의 흐름은 이겨낼 수 없었다. 군함은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잃고 노후화로 수명이 다해 폐선으로 매각됐고, 템스강에서 로더히스에 있는 조선소로 예인돼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많은 언론이 군 복무를 마치고 퇴역하는 테메레르의 마지막 여정을 앞다퉈 보도했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터너는 테메레르가 예인되는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영웅적인 군함의 퇴장을 기념하는 풍경화를 그렸다. 대항해 시대의 영광을 상징하는 전함 테메레르는 크고 밝고 장엄하게, 제1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문명을 상징하는 증기 동력 예인선은 작고 어둡고 강하게 표현했다. 구시대와 신시대가 교체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두 척의 배를 대비시켜 암시한 것이다. 노을빛이 템스강을 물들이는 시간대를 선택한 의도는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는 테메레르에 바치는 작별 의식이자 영웅적 힘의 소멸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터너는 이 풍경화에 등장한 두 척의 배를 통해 영국의 위대함을 보여줬다.
전함인 테메레르는 과거의 영광, 증기 예인선은 오늘의 영광을 대변한다. 증기선은 영국이 기술혁신을 주도한 최첨단 국가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국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에 따라 증기기관, 방적기술, 제철기술이라는 3대 기술혁명으로 대표되는 제1차 산업혁명이 최초로 시작된 나라다. 터너는 새로운 산업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증기선의 역동성을 찬양하기 위해 배의 굴뚝에서 불꽃의 연기를 거침없이 내뿜는 장면을 연출했다. 터너는 영국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이 작품을 ‘애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고 구매자들이 비싼 가격을 제시해도 팔지 않고 국가에 기증했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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