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산업은 신임 대표로 조진환 티엘케미칼 대표와 정철현 알켄즈 전무를 28일 내정했다. 조 내정자는 석유화학사업본부, 정 내정자는 섬유사업본부를 맡게 된다. 정 내정자는 그룹의 섬유 자회사인 대한화섬 대표도 겸임할 예정이다. 두 명 모두 그룹 공채 출신이다.
1958년생인 조 내정자는 1982년 태광산업에 입사한 뒤 석유화학 공장장, 울산본부 설비관리실장 등을 거쳐 올 초 티엘케미칼 대표에 선임됐다. 1964년생인 정 내정자는 1989년 대한화섬에 입사해 대한화섬 공장장과 나일론·아크릴 공장장 등을 지냈다. 이들 대표에 대한 인사는 오는 3월 이사회와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확정된다.
태광산업은 기존 각자 대표이던 정찬식 사장과 박재용 사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의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태광산업 고위 관계자는 “기존 대표들이 갑작스럽게 사의를 밝힌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의 배경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LG화학 부사장 출신으로 지난해 3월 대표에 선임됐다. 1963년생인 정 사장은 한양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한 후 1988년 LG석유화학(현 LG화학)에 입사했다. 여수공장 NCC 공장장, 대산공장 모노머 공장장, ABS 사업부장 부사장 등을 거쳤다. LG화학에서도 대표적인 현장 전문가로 손꼽혔다.
효성 상무 출신인 박 사장은 2020년 6월 영입됐다. 박 사장은 1967년생으로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후 효성첨단소재 자회사인 GST 대표이사, 효성첨단소재 GST관리담당 등을 지냈다.
태광산업은 지난해 3월부터 정 사장과 박 사장의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구성했다. 정 사장이 석유화학본부, 박 사장이 섬유사업본부를 맡았다. 각자 대표 체제가 구성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전격 교체된 것이다. 기존 두 각자 대표의 임기는 2023년 3월 말까지였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사장단을 전격 교체한 것에 대해 회사 내부에서도 적잖은 동요가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자 대표 체제가 구성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두 대표이사가 모두 전격 교체된 것은 재계에서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임직원들이 사장단 경질 발표 직전까지도 이번 인사를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광산업은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현장 경험이 풍부한 새 대표 선임을 통해 사업을 안정화하고 새로운 도약을 꾀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래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변화와 혁신으로 기업문화를 쇄신하고 신규사업도 적극 발굴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태광산업의 이 같은 설명에 대해 회사 안팎에선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3월 외부 인사 출신으로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구성했을 당시에도 혁신을 앞세워 신규사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당시 정 사장이 신임 대표로 취임하면서 2016년부터 5년간 회사를 이끈 홍현민 대표가 물러나는 등 세대교체도 이뤄졌다. 외부 인사 영입을 통한 체질 개선으로 과감한 투자를 통해 그룹 사세를 키우겠다는 계획이었다. 태광그룹은 이호진 전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시작된 2011년만 하더라도 재계 30위권이었지만 지난해엔 49위까지 밀려났다.
실제로 태광산업은 지난해 6월 LG화학과 함께 아크릴로니트릴(AN) 공장을 짓기로 하는 등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섰다. 태광산업의 합작법인 설립은 창사 이후 처음이었다. 대규모 설비투자도 2012년 탄소섬유공장을 증설한 이후 이후 9년만이었다. 한국수력원자력, 현대자동차, SK가스 등과 손잡고 부생수소를 활용한 부하대응 연료전지 시범사업에서 원료인 부생수소를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뿐만 아니라 정 사장과 박 사장 모두 각 업계에서 오랜 경험을 보유한 현장 전문가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사를 선임했다’는 태광산업의 설명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변화와 혁신을 앞세우겠다는 회사 설명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석유화학사업을 맡게 되는 조 내정자는 1958년생으로, 정 사장(1963년생)보다 나이가 많다. 섬유사업을 맡는 조 내정자도 1958년생으로, 박 사장(1967년생)보다 나이가 많다. 무엇보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사장단을 전격 교체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임직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태광산업 최대주주인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의중이 전적으로 반영된 인사라는 해석이 나온다. ‘황제보석’ 논란을 일으키며 8년 5개월에 이르는 재판 끝에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이 전 회장은 작년 10월 만기 출소했다.
그는 2011년 횡령·배임과 법인세 포탈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건강 등을 이유로 재판 기간에 7년 넘게 풀려나 있었으나 ‘황제보석’ 논란이 불거지면서 2018년 말 구속 수감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이어 2019년 6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향후 이 전 회장이 경영에 공식 복귀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그룹의 금융 계열사인 흥국생명, 흥국화재, 고려저축은행 등의 경영 복귀는 불가능하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끝나거나 집행이 면제된 날부터 5년이 지나지 않으면 금융회사 임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전 회장이 최대주주로서 지배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그룹 인사 등 경영 전반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전 회장은 태광산업 지분 29.5%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태광산업의 2대 주주인 티알엔(11.2%)도 이 전 회장이 지분 51.8%를 보유 중이다. 핵심 금융계열사인 흥국생명도 이 전 회장이 지분 56.3%를 보유하고 있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태광산업의 두 대표이사를 전격 경질한 것도 이 전 회장의 지시가 없었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태광산업 관계자는 “이번 인사에 이 전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 경제계 관계자는 “두 명의 대표이사를 교체한 이 전 회장의 의중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면서도 “외부인사 대신 두 명의 내부 인사를 선임한 것을 볼 때 본격적인 ‘친정체제’를 갖추기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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