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물적분할과 자본시장의 숙제

입력 2022-02-02 17:30   수정 2022-02-03 00:16

불과 20년 전 일이다. ‘TV 하면 소니’라고 하던 시절. 차도 마찬가지였다. 돈만 더 있으면 외제차를 사지, 현대차는 할 수 없이 산다고들 했다. 제약업체들은 미국·유럽 대형 제약사의 신약을 복제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한국 영화와 음악은 세계시장에서 말 그대로 제3세계의 낯선 장르 정도로 취급받았다. 나라에는 돈도 없었다.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과 은행을 외국계 사모펀드에 팔아 치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로 돌아가서 지금 상황을 보면 매우 비현실적이다. 소니의 왕좌는 삼성전자가 차지한 지 오래다. 외제차 타다가 현대차로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국의 음악과 영화, 드라마는 글로벌 시장의 중심축이 됐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공개되자마자 각국 넷플릭스 순위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 웹툰의 세계적 확산은 만화란 단어를 옥스퍼드 사전에 등록되게 했다. 제약사 가운데서도 글로벌 플레이어가 나올 조짐이다.
자금원천 은행서 자본시장으로
이런 비현실적 사건들의 경로를 역추적하다 보면 돈과 마주하게 된다. 원조와 차관 이후엔 은행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일화 한 가지. 박정희 대통령은 어느 날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정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 청와대 참모가 나중에 “뭘 알고 대답한 거냐”고 묻자 정 회장은 그냥 “할 수 있다”고만 답했다. 정 회장은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왔다. 그다음은 은행 차례였다. 청와대는 현대에 돈을 대주라고 은행에 지시했다. 세계를 제패한 조선업의 시작이었다. 다른 대기업의 성장도 마찬가지 경로를 따랐다. 은행은 산업화 과정에서 젖줄 역할을 했다.

은행의 시대는 1997년 외환위기로 막을 내린다. 한 증권사 사장은 “과거 대기업은 은행이 키웠지만 유니콘 기업은 자본시장이 일궈냈다”고 했다. 증권사, 사모펀드(PE), 주식시장이 2000년대 이후 은행의 역할을 이어받았다. 크래프톤은 국내 사모펀드의 투자로 위기를 넘기고 게임업계 강자가 됐다. 셀트리온 네이버 카카오 등은 상장을 통해 돈을 끌어모아 성장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자본시장에서 젖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물적분할이 대표적 사례다. 다시 대기업이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신사업을 위해 대규모 자금 조달에 나섰다. 물적분할과 상장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마침 주식시장도 뜨거웠다.
천만투자자 눈높이 고려해야
하지만 이들이 놓친 게 있다. 1000만 명이 주식 투자를 하는 국민 주식 시대가 됐다는 점이다. 주주 권리는 그만큼 세졌다. 과거처럼 주주 권리가 침해당해도 소수의 외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문제 제기는 순식간에 사회적 이슈가 된다. 물적분할로 신사업을 하는 법인의 주식을 한 주도 못 갖게 된 주주들은 이를 사회문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경영의 메가트렌드가 된 것도 이런 대기업들의 자금 조달 방식에 문제 제기를 하게 한 또 다른 배경이다.

대기업들도 사정은 있다. 과거 은행과 함께 또 다른 자금원이던 계열사 지원이 불가능해져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순환출자를 통한 가공자본 형성의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서두른 이유도 있다. 2차전지 같은 사업은 세계시장을 놓고 수주 경쟁을 하기 때문에 발 빠른 투자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1000만 투자자 시대가 현실이다. 그들의 눈높이를 맞춰야 투자자들이 자본시장에 머물고, 또 다른 비즈니스를 할 때 젖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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