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자기만족을 목표하는 예술가와 달리 고객과 사용자의 만족을 위해 일한다. 이를 위해 디자이너는 고객의 불평·불만을 수용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 같은 성향이 고객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억울한 일이 닥쳤을 때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그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디자이너가 수두룩하다. 또 디자이너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제안이 ‘최선’임을 외롭게 주장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 설득에 실패해 제안이 거부당하더라도 박탈감을 홀로 감내해야 한다.
디자이너에 대한 처우는 아직 열악한 수준이다. 국회에서 디자이너 과로 자살 진상 조사 결과 발표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토론회를 연 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은 듯하다. 직장 상사는 퇴근 30분 전에 디자이너에게 업무를 맡기며 “간단한 건데 내일 아침까지 줄 수 있지?”라고 말한다. 인테리어에는 수천만, 수억원을 쓰면서 기업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담는 로고 디자인은 “밥 한 끼”로 대신하려는 무례한 사람도 있다. 자신의 감식안을 과신한 나머지 디자이너의 선택을 제멋대로 망가뜨려 버리는 비전문가가 수두룩한가 하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많은 수정을 요구하고선 “미안, 처음 시안이 더 낫네”라며 허무한 말을 던지는 클라이언트도 많다.
인식 개선과 더불어 제도적 해결책도 필요하다. 디자인계는 산업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데 비해 사업장 수는 2018년 6500곳에서 매년 1000곳씩 꾸준히 늘어 현재 디자인 전문 기업이 1만 개에 육박하는 과포화 상태다. 훌륭하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가 ‘차고 넘치는’ 상향 평준화의 시대에서 뛰어난 디자인 스킬과 좋은 포트폴리오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아이폰을 디자인한 조너선 아이브, 애플파크를 건축한 노먼 포스터,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조너선 반브룩, 색동 줄무늬 패션으로 유명한 폴 스미스, 세련된 디자인으로 전 세계 주부를 사로잡은 다이슨의 제임스 다이슨까지. 모두 영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그런데 이들에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모두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좋은 디자인이 배출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 K팝과 K드라마 뒤에는 많은 디자이너의 땀과 노력이 있다. K웨이브를 만들어가는 K디자인을 논하기에 앞서 디자이너에 대한 정당한 존중을 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된다.
윤주현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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