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골퍼들에겐 매우 익숙한 곳이다. 유명 골프장들이 즐비해서다. 북내면에서 강천면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신라CC, 스카이밸리CC, 360도CC, 캐슬파인GC 등이 어깨를 맞대고 들어서 있다. 신륵사 위쪽으로도 세라지오CC, 블루헤런GC가 있고, 여주 남쪽으로는 여주CC, 해슬리나인브릿지CC, 금강CC, 남여주GC가 자리 잡고 있다.
잘생긴 지형 덕분에 여주엔 예로부터 명당자리가 많았다. 세종대왕 영릉, 효종 대왕 영릉을 비롯해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로 꼽히는 신륵사와 한국 불교 3대 선원으로 불렸던 고달선원의 터가 여주에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외국인들에게 소개해 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과 문화유산 순례 코스 중 하나로 두 대왕의 영릉과 고달사터, 신륵사를 돌아보는 일정을 추천하기도 했다.
‘골멍쉬멍’이라는 콘셉트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여주를 1번 타자로 내세운 데엔 여주 땅이 가진 보물들이 워낙 많아서다. 이번 여행 코스는 신라CC에서 시작해 파사산성과 이포보 자전거길로 이어진다. 골프와 등산, 라이딩까지 당일에 모두 소화했으니 나름 철인 3종 경기라 할 만하겠다.
현재 신라CC가 대중제로 전환했고, 소유주도 여러 차례 바뀌어 명칭의 유래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긴 하지만, 여주 땅에 골프장을 지으면서 명칭에 신라를 붙인 데엔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법 싶다. 먼 옛날 삼국시대 때 여주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던 땅이다. 막국수로 유명한 천서리에서 양평 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파사산성이 그 증거다. 남한강 동쪽 해발 230.4m의 파사산 꼭대기에 돌로 쌓은 성이다.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전초기지로 쌓았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추정이다.
파사산성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생수 하나 들고 가볍게 정상을 향해 올라본다. 해발고도만 생각해 얕봤다간 큰코다칠 것이라는 듯, 초입부터 오르막길이 제법 가파르다. 바닥이 미끄러운 운동화로는 내려올 때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경사다. 그래도 오르막은 금세 끝난다. 어른 걸음에 30분이면 족하다. 파사산성은 전쟁터에 쌓은 돌성이어서 그런지 문이 남쪽과 동쪽에만 나 있다. 높은 곳을 차지한 남문의 위용이 당당하다. 성안에 살던 이들도 사다리를 이용해 출입했다고 한다. 아래에서 산길을 따라 몰려온 적들은 남문에서 날아온 화살 세례를 피할 길이 없었을 것 같다.
남동쪽은 모두 남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6세기는 고구려가 북쪽의 돌궐과 맞서느라 한강 이북과 동쪽 함경도까지 나제연합군의 공세를 받던 때다. 향토사학자 김민의 『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에 따르면 이 시기에 신라는 한강 이북의 백제 땅까지 차지했다. 백제는 차를 주는 대신, 포를 받는 전략을 취했다. 서해로 이어지는 한강 하구 땅을 확보해 아래 충남, 전라도와 남북으로 땅을 잇는 데 주력했다.
정상부는 그리 넓지 않다. 정예군 100여 명 정도만 허락했을 것 같은 공간이다. 정상에서 양평 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 있다.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을 보러 갈 수 있는 길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선으로 새긴 불상으로 입체감은 없지만, 불상 위에 광배까지 표현해놨다. 우리 산천 곳곳에 숨겨진 역사의 현장엔 이처럼 민초들의 삶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사람과 물의 합류 지점인 여주 또한 그런 곳이다. 파사성은 고려 시대에도 한강을 오가기 위한 관문 역할을 했을 터인데, 양평에서 여주를 왕래하던 불심 깊은 민초들은 바위 위에 새겨진 불상에 절하며 여행길의 안위를 빌었을 것이다.
파사성에서 내려와 곧바로 이포보 자전거 도로 위를 달렸다. 평지 길이어서 나의 미니벨로로도 충분히 속도를 즐길 수 있었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끝없이 이어진 자전거 도로는 국토 종주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강을 따라 달리자니 마음속 상념들이 모르는 사이 사라져 버린다. 물오리들이 한가롭게 유영하는 강 위로 석양이 조용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조선 말 이포 나루터엔 초가들이 열 지어 서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강변의 서정을 즐기려는 이들의 아주 잘생긴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요즘엔 카페가 몇 곳 생겨서인지, 관광객들도 제법 찾는다.
근대 초기까지도 이포 나루는 양평쪽에서 올라온 물산을 수로를 따라 싣고가는 상인들이 자주 오가던 곳이다. 자전거길 중간에 '개군 추읍 순교자'라는 표식의 석물이 하나 서 있다. 조선 말 이곳은 추읍산 기슭 주변 개군면 주읍리였던 모양인데 병인박해 시기에 순교한 이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강을 따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던 터라 믿음을 전파하기에 편하고, 인파 속에 숨어 살기에도 적합했기에 여주는 구한말 천주교인들이 뿌리를 내린 땅이었다.
보통 신라CC에 오면 천서리에 들러 막국수 한 그릇 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다. 하지만 이번엔 여주읍 현암리에 있는 동네막국수라는 곳을 방문했다. 오로지 막국수와 수육만 하는 내공이 꽤 깊어 보이는 식당이다. 동네 주민들이 자주 들르는 맛집이어서 그런지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역사 유적 가득한 여주 여행
여주 땅이 골프 명당이 된 데엔 지세가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여주 중심부에 여강(驪江)이라고 불리는 충주에서부터 흘러온 남한강 지류가 유유히 흐르고, 그 주변으로 너른 농지가 펼쳐져 있다. 곳곳의 야트막한 산들은 시원한 조망을 제공해준다. 여주의 산들은 해발 고도 300m 이하로 숫자로는 낮아 보이지만, 주변의 평지와 대비돼 제법 치고 올라가는 맛이 있다. 그래서 정상부에 올라가면 주변 사위를 둘러볼 수 있을 만큼 눈맛이 시원하다.잘생긴 지형 덕분에 여주엔 예로부터 명당자리가 많았다. 세종대왕 영릉, 효종 대왕 영릉을 비롯해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로 꼽히는 신륵사와 한국 불교 3대 선원으로 불렸던 고달선원의 터가 여주에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외국인들에게 소개해 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과 문화유산 순례 코스 중 하나로 두 대왕의 영릉과 고달사터, 신륵사를 돌아보는 일정을 추천하기도 했다.
‘골멍쉬멍’이라는 콘셉트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여주를 1번 타자로 내세운 데엔 여주 땅이 가진 보물들이 워낙 많아서다. 이번 여행 코스는 신라CC에서 시작해 파사산성과 이포보 자전거길로 이어진다. 골프와 등산, 라이딩까지 당일에 모두 소화했으니 나름 철인 3종 경기라 할 만하겠다.
신라CC 이름의 유래, 경주CC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데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를 쓴 류석무에 따르면 신라CC는 재일 동포가 운영하던 삼공개발이 만들었다. 회사 소유주가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 친했다고 한다. 당시 삼성그룹의 신라호텔에서 운영하던 제과업을 인수해 ‘신라명과’를 운영하기도 했고, 그래서 1995년 여주에 골프장을 지을 때 이름을 ‘신라’로 지었다는 것이다. 경주에 있는 신라CC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현재 신라CC가 대중제로 전환했고, 소유주도 여러 차례 바뀌어 명칭의 유래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긴 하지만, 여주 땅에 골프장을 지으면서 명칭에 신라를 붙인 데엔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법 싶다. 먼 옛날 삼국시대 때 여주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던 땅이다. 막국수로 유명한 천서리에서 양평 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파사산성이 그 증거다. 남한강 동쪽 해발 230.4m의 파사산 꼭대기에 돌로 쌓은 성이다.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전초기지로 쌓았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추정이다.
파사산성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생수 하나 들고 가볍게 정상을 향해 올라본다. 해발고도만 생각해 얕봤다간 큰코다칠 것이라는 듯, 초입부터 오르막길이 제법 가파르다. 바닥이 미끄러운 운동화로는 내려올 때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경사다. 그래도 오르막은 금세 끝난다. 어른 걸음에 30분이면 족하다. 파사산성은 전쟁터에 쌓은 돌성이어서 그런지 문이 남쪽과 동쪽에만 나 있다. 높은 곳을 차지한 남문의 위용이 당당하다. 성안에 살던 이들도 사다리를 이용해 출입했다고 한다. 아래에서 산길을 따라 몰려온 적들은 남문에서 날아온 화살 세례를 피할 길이 없었을 것 같다.
남동쪽은 모두 남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6세기는 고구려가 북쪽의 돌궐과 맞서느라 한강 이북과 동쪽 함경도까지 나제연합군의 공세를 받던 때다. 향토사학자 김민의 『6세기 중엽 한반도 중서부에서의 백제-신라의 영토교환』에 따르면 이 시기에 신라는 한강 이북의 백제 땅까지 차지했다. 백제는 차를 주는 대신, 포를 받는 전략을 취했다. 서해로 이어지는 한강 하구 땅을 확보해 아래 충남, 전라도와 남북으로 땅을 잇는 데 주력했다.
남한강변에 우뚝 솟은 파사산성
파사산성 정상에 오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남한강 유역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큰 강을 조망할 수 있는 산성중에선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임진강변의 호로구로 산성과 양대 산맥이라고 할 만하다. 파사성의 백미는 한여름 소나기가 쏟아질 무렵, 산성 중턱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 아래에 서 있을 때라고 한다. 우중에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깊은 서정에 빠져들 법하다.정상부는 그리 넓지 않다. 정예군 100여 명 정도만 허락했을 것 같은 공간이다. 정상에서 양평 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 있다.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을 보러 갈 수 있는 길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선으로 새긴 불상으로 입체감은 없지만, 불상 위에 광배까지 표현해놨다. 우리 산천 곳곳에 숨겨진 역사의 현장엔 이처럼 민초들의 삶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사람과 물의 합류 지점인 여주 또한 그런 곳이다. 파사성은 고려 시대에도 한강을 오가기 위한 관문 역할을 했을 터인데, 양평에서 여주를 왕래하던 불심 깊은 민초들은 바위 위에 새겨진 불상에 절하며 여행길의 안위를 빌었을 것이다.
파사성에서 내려와 곧바로 이포보 자전거 도로 위를 달렸다. 평지 길이어서 나의 미니벨로로도 충분히 속도를 즐길 수 있었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끝없이 이어진 자전거 도로는 국토 종주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강을 따라 달리자니 마음속 상념들이 모르는 사이 사라져 버린다. 물오리들이 한가롭게 유영하는 강 위로 석양이 조용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조선 말 이포 나루터엔 초가들이 열 지어 서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강변의 서정을 즐기려는 이들의 아주 잘생긴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요즘엔 카페가 몇 곳 생겨서인지, 관광객들도 제법 찾는다.
근대 초기까지도 이포 나루는 양평쪽에서 올라온 물산을 수로를 따라 싣고가는 상인들이 자주 오가던 곳이다. 자전거길 중간에 '개군 추읍 순교자'라는 표식의 석물이 하나 서 있다. 조선 말 이곳은 추읍산 기슭 주변 개군면 주읍리였던 모양인데 병인박해 시기에 순교한 이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강을 따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던 터라 믿음을 전파하기에 편하고, 인파 속에 숨어 살기에도 적합했기에 여주는 구한말 천주교인들이 뿌리를 내린 땅이었다.
보통 신라CC에 오면 천서리에 들러 막국수 한 그릇 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다. 하지만 이번엔 여주읍 현암리에 있는 동네막국수라는 곳을 방문했다. 오로지 막국수와 수육만 하는 내공이 꽤 깊어 보이는 식당이다. 동네 주민들이 자주 들르는 맛집이어서 그런지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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