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여개 줄 1㎜ 단위로 조율…피아노 音, 하나하나 빛날 때 짜릿"

입력 2022-02-17 16:40   수정 2022-02-18 02:18


88개의 건반과 250여 개의 줄로 이뤄진 피아노는 ‘작은 오케스트라’로 불린다. 영롱한 선율로 온갖 화성을 빚어낼 수 있어서다. 독주용 악기로 알려졌지만 피아니스트 홀로 치는 악기는 아니다. 연주자 곁에는 늘 피아노 조율사들이 있다. 이들은 음의 잔향까지 고려해 줄을 조이고 풀며 피아노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한다. ‘피아노 주치의’라고 불리는 이유다.

피아노 조율사 김현용 씨(52)는 피아노를 손보려고 왕진을 다니듯 전국을 다녔다. 1990년 처음 소리굽쇠를 손에 쥐고 음정을 맞춘 이후 피아노 선율을 다듬어온 지 32년째. 지금까지 7만여 대의 피아노를 손봤다. 곳곳을 돌아다닌 거리가 120만㎞에 달한다. 지구를 약 30바퀴 돈 셈이다. 지금은 KBS아트홀의 전속 피아노 조율사이자 최연소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0년 TV에서 피아노 조율사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생소했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단박에 평생직업이라고 생각했죠. 손재주로 피아노라는 작은 오케스트라를 제작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어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6개월 정도 피아노 조율학원에 다니면서 기능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피아노 조율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피아노 줄의 장력을 조절해 정확한 음정을 찾는 ‘조율’, 페달과 피아노 해머 등 부속품을 조절해 음색을 바꾸는 ‘조정’, 줄과 해머를 정돈해 음질을 최상으로 바꾸는 ‘정음’이다. 김 회장은 이를 학교 수업에 비유했다.

“조율사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조율은 예체능 수업이라는…. 드라이버로 줄을 1㎜ 단위로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정확한 음정을 찾는 조율 과정에선 수학이 필요하고, 조정과 정음작업은 음감이 필요한 음악 수업이죠. 칠도 하고 부품 수리를 하려면 목공 기술도 필요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체력입니다. 피아노를 수리하고 분해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어서 체육 시간이라고 합니다.”

음감만 갖춰선 조율사 일을 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허풍은 아니었다. 그는 늘 무게 30㎏짜리 공구함을 두 개씩 들고 다닌다. 드라이버, 바늘, 소리굽쇠, 망치 등 온갖 도구를 항상 구비한다. 연주자들이 원하는 소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음색을 두고 서로 합의점을 찾는 게 특히 고역이라고 했다.

“피아니스트들이 관객을 마주하기 전에 긴장하는 것처럼 조율사도 연주자를 만나기 전에 항상 떨립니다. 음정은 표준화됐지만 연주자들이 원하는 음색을 짚는 게 어렵죠. ‘소리가 뜨겁고 가벼운데 어둡게 해달라’고 요청할 땐 참 곤혹스럽죠. 그래도 연주자와 교감하며 합의점을 찾을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베테랑 조율사지만 연주자의 취향을 먼저 고려한다는 설명이다. 조율에는 장인정신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유연성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김 회장은 2004년 그때까지 고수했던 조율 방식을 바꿨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피아노 조율 마이스터(장인) 자격을 딴 박성환 조율사에게 유럽식 조율법을 전수받았다.

“박 조율사가 귀국하기 전까지는 유럽 유학을 다녀온 선배들이 없었어요. 클래식의 고장에서 익힌 조율법을 배우고 싶어 ‘제자로 받아달라’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박 조율사 덕분에 반음계까지 신경쓰며 촘촘히 튜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완벽주의 성향 탓에 직업병도 생겼다. 줄의 떨림을 미세하게 측정하다 보니 진동과 소음에 예민해진 것. TV에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가 나오면 곧장 꺼버린다고 했다. “온·습도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면 TV를 끕니다. 30여 년을 조율하다 보니 미세한 떨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버릇이 들었습니다. 운전할 때에도 잔고장을 귀로 먼저 느껴요.”

국내에서 손꼽히는 피아노 조율사로 자리잡았지만 그는 나이 마흔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세한대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것. “늘 마음속에 부채 같은 것이 있었어요. 처음부터 음악 이론을 배웠다면 실력을 한층 높였을 것이라는 후회죠. 연주자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는데, 음악을 좀 더 배운다면 소통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대학원까지 마친 그는 지난해 필리핀 제너럴 트리아스대학 피아노 조율과 교수로 임용됐다. 코로나19 탓에 정식으로 수업은 시작하지 못했지만 후학을 양성할 기대에 부풀었다. 그는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에서도 후학을 양성할 예정이다.

“완벽한 피아노 주치의가 되려고 지난해 도장(칠) 기능사 자격증과 목공기능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피아노의 겉까지 고칠 수 있게 된 거죠. 남부끄럽지 않게 피아노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이제 제가 쌓은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죠.”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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