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을 뒤덮은 지는 수십억 년이 지났다. 다만 인간이 박테리아 존재를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처음 학계에 발견을 알린 게 1676년이다.
다른 생물체에 기생해 부패와 질병을 일으켜왔지만 너무나도 작은 몸집이 존재를 숨기고 있던 것이다. 크기는 통상 0.5에서 5마이크로미터(㎛) 수준이다. 1㎛는 100만분의 1m, 즉 0.001㎜ 크기다.
연구자들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박테리아를 잘 파악하고 피해를 막는 것은 인류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표면증강 라만 분광법(SERS)’은 이런 노력의 한 성과다. 빛을 쏴서 표면에 일어나는 진동 에너지 변화, 이른바 ‘라만 신호(물질 신호)’를 관찰하는 기법이다.
실험에 필요한 시료 양이 적어도 결과가 잘 나온다는 특징 때문에 널리 쓰였다. 하지만 SERS도 완전하지 않았다. 박테리아는 어느 환경에나 녹아들 수 있어서 매개 물질의 신호를 제거하거나 시간을 들여 박테리아를 분리해야만 했다.
KAIST 조성호 전산학부 교수와 정연식 신소재공학과 교수 공동 연구팀은 인공지능(AI) 기법을 적용해 새 돌파구를 찾아냈다. 딥러닝 기술을 SERS에 결합해 별도 전처리가 필요하지 않은 박테리아 검출 플랫폼을 최초로 만든 것이다. 연구팀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국제학술지 ‘바이오센서 및 바이오일렉트로닉스’에 게재했다.
연구팀이 주목한 점은 AI의 ‘디테일’이었다. 우유, 물, 소변, 소고기 용액, 배양 배지 등 다양한 환경에서 나오는 박테리아 물질 신호를 AI에 그대로 학습시켰다. 빛을 쏘았을 때 파장별로 펼쳐지는 세밀한 스펙트럼 분포를 AI가 포착하도록 했다.
연구팀이 개발한 AI 검출 모델 ‘듀얼WK넷’은 대장균과 표피포도상구균이란 두 가지 박테리아를 대상으로 검출 정확도 98%를 달성했다. 조 교수는 “별도 박테리아 분리 과정 없이 수초 이내 현실적 검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게 됐다”며 “향후 식품 안전 점검이나 병원균 조기 감지 등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출한 박테리아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실제 의료 분야에 응용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박선화·김영주 교수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AI와 박테리아를 활용한 조산 위험 예측 모델을 개발했다. 지난해 관련 논문을 미국 생식면역학회지에 발표하고 현재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조산 여부는 ‘락토바실러스 이너스’ ‘유레아플라즈마 파붐’ 박테리아의 검출 정도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박 교수 연구팀은 80명 상당 임신 중기 임신부의 질액을 채취해 AI에 학습시켰다. AI는 두 종류 박테리아의 비중을 따져 조산 확률을 72% 정도까지 예측하는 수준으로 고도화됐다. 연구팀은 진단 전문회사 디앤피바이오텍과 함께 상용화를 위한 공동 연구도 이어가고 있다.
박 교수는 “어떤 신호도 없이 갑작스럽게 조산이 찾아오는 경우가 전체 미숙아 중 3분의 2에 달하고 합병증 위험도 크다”며 “임상시험을 거쳐 AI 기반 조산 예측 모델을 고도화하고 2년 내 상용화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