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시대…'삼성전자 배지' 단 외교관들, 존재감 커졌다 [강경주의 IT카페]

입력 2022-02-20 15:07   수정 2022-02-20 17:17


삼성전자 조직 내 전직 고위 외교관들의 입김이 날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미중 무역 갈등이 조 바이든 현 행정부로 들어서면서 더욱 격화해, 삼성전자의 외교 리스크 관리 필요성이 전보다 커진 탓으로 풀이된다. 세계 곳곳에서 사업을 하는 국내 대기업들 역시 지정학적 이슈를 신경 쓸 수 밖에 없어 업계의 '외교 역량 강화'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삼성전자 북미법인, 마크 리퍼트 영입
1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북미법인은 최근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북미법인 대외협력팀장 겸 본사 부사장에 임명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리퍼트 전 대사는 다음 달 1일부터 삼성전자 워싱턴DC 사무소를 이끌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보도자료를 통해 "리퍼트 전 대사가 지정학, 입법, 규제 동향 등의 정책을 북미법인의 사업 전략에 반영할 것"이라고 했다. 최경식 삼성전자 북미총괄장은 "리퍼트 전 대사는 삼성전자에 수십 년에 걸쳐 쌓은 공공 정책 경험은 물론 미국 내 사업에 지정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고 기대를 표했다.

리퍼트 전 대사는 "삼성전자 북미법인은 40년 이상 미국 기술 리더십을 주도해왔고, 한미 경제 관계의 핵심에 자리한다"며 "미국과 세계에서 미래 기술을 형성할 혁신에 투자하는 회사에 합류하게 돼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삼성전자의 리퍼트 전 대사 영입은 미국 내 정치적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졌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미중 전략 경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지정학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 게 리퍼트 전 대사의 삼성전자 합류 시발점으로 읽힌다.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반도체·자동차 배터리 등 제조업 부활을 추진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정보력과 정부 및 의회 대응이 중요해졌다.

삼성전자를 둘러싼 국제 상황을 비춰봤을 때 리퍼트 전 대사의 영입은 '신의 한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을, 동 대학원에서 국제정책학을 전공한 뒤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민주당·캘리포니아주)을 비롯해 여러 의원을 보좌했다.

2005년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상원 의원이던 시절 외교안보 보좌관을 지냈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 때 국방부 아태담당 차관보(2012~2013년)와 국방장관 비서실장 등을 거쳤다. 2014년 10월부터 2017년 1월까지는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재임 초기부터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낳은 아들과 딸의 이름을 한국식인 '세준', '세희'로 지었다. 2015년 3월에는 한 강연회 참석 중 흉기로 피습을 당해 얼굴에 자상을 입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한미 동맹의 상징 구호인 "같이 갑시다"를 말하며 침착하게 대응해 한국인들의 호감을 샀다.

대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미국 보잉사,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등에서 대관 업무를 맡았다. 2020년부터는 유튜브 아시아태평양지역 정책 총괄을 맡았다.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의 정부를 대상으로 유튜브 정책을 알리고 조율하는 자리였다.
김원경 대외협력담당 부사장 역할론 커질 듯
리퍼트 전 대사가 미국 현지에서 삼성전자의 외교 업무 등을 담당한다면 이재용 삼성전자가 부회장 지근거리에서 외교 현안을 직보하는 한국인 임원이 있다. 지난해 12월9일 이 부회장이 중동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동행해 취재진들의 이목을 끌었던 남자. 이 부회장이 통상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수행원을 대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더 많은 시선이 쏠렸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김원경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부사장(57)이다. 김 부사장은 당시 아랍에미리트(UAE) 출장 내내 이 부회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좌했다.

당시 이 부회장이 김 부사장을 직접 대동한 것을 두고 중동 출장에서 글로벌 주요 정·재계 인사들을 만났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김 부사장은 지난해 11월 이 부회장이 미국 출장 중 워싱턴D.C에서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등 백악관 고위 관계자들을 만날 때도 동행했던 인물이다.

김 부사장은 고려대 법학과, 조지타운대 법학석사, 존스홉킨스대 국제공공정책학 석사를 수료한 뒤 주미대사관 1등서기관, 세르비아대사관 참사관, 다자통상국 과장, 한미FTA(자유무역협정)기획단 협상총괄팀장, 통상교섭본부장 보좌관, 주미대사관 경제과 참사관 등을 거친 국제통상, 외교 행정의 전문가로 꼽힌다.

2012년 3월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글로벌마케팅실 마케팅전략팀, 글로벌마케팅실 리테일전략그룹장, 글로벌마케팅실 마케팅전략팀장, 무선사업부 구주PM그룹 등을 거쳐 현재 해외 현지 정부와의 소통과 해외법인 관리 등 대외협력을 담당하는 GPA(Global Public Affairs·글로벌공공업무)팀을 총괄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중동 출장 후 "아부다비에서 '조그만 회의'가 있었다"며 "전 세계 각계 방면에서 전문가들이 참석해 세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각 나라와 산업계에서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언급한 '조그만 회의'는 매년 말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부다비 왕세제가 주최하는 비공개 사교 모임으로 추정된다. 모하메드 빈 자이드 왕세제는 그동안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칼라일그룹 공동 창업자 등 각국 정계 인사들과 기업인을 아부다비로 초청해 영향력을 과시해왔다. 이 같은 다자 간 국제 VIP들이 모이는 민간 외교 행사에 대한 출장 준비를 김 부사장이 진두지휘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스코 '비건' 영입..LG그룹도 워싱턴DC에 새 사무소
업계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하고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요구 등 삼성전자의 대외 산업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인 점에 비춰 리퍼트 전 대사의 역할이 작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 행정부 관료 경험과 한국 기업 문화에 대한 이해도, 대사 퇴임 후 여러 대관 업무를 맡은 점이 리퍼트 전 대사의 강점이라는 것. 김 부사장에 대한 역할론도 과거보다 더 두드러질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다양한 사업을 하는 국내 대기업들의 외교 역량 강화 추세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지난해 가을 스티븐 비건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포스코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포스코 미국법인이 비건 전 장관이 속한 컨설팅회사와 자문계약을 맺은 형태다. 그는 국제관계 및 투자, 친환경, 통상 문제를 조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그룹은 SK와 배터리 소송을 벌이면서 글로벌 대관 업무 필요성을 느껴 최근 워싱턴DC에 사무소를 새로 열었다. 행정부와 정치권 경험을 두루 갖춘 전직 관료가 곧 영입될 거란 소문이 파다하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을 상대로 민감한 정보 공개를 요구한 것이 삼성전자가 리퍼트 전 대사를 영입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일 것"이라며 "그가 외교 거물이긴 하지만 이제 줄을 하나 뚫어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앞으로 추가 영입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이어 "그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중요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우리도 그에 걸맞는 국제 외교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관리하는 인재 운용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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