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노란 하늘을 배경으로 녹색과 푸른색, 붉은색과 흰색의 산등성이가 펼쳐진다. 팔뚝만 한 붓을 단숨에 휘둘러 그려낸 산세엔 힘이 넘치고, 형형색색의 물감을 머금은 한지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찬찬히 그림을 살피다 보면 배경의 묘한 광채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이윽고 추상적인 색면인 줄로만 알았던 그림 윗부분이 사실은 거대한 보름달의 한 귀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울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화가 류재춘(52)의 개인전 ‘마음의 달, 풍요를 품다’에 걸린 ‘산’ 연작이다.
류 작가의 그림은 일종의 반추상화다. 풍요와 행복을 상징하는 보름달이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그려져 있다. 아크릴 물감으로 만들어낸 다양한 색조를 보면 동양화보다는 서양화에 가깝다. 노란색과 비현실적인 색채를 띤 산의 대비, 삼각형으로 단순화된 산자락에서 유영국의 ‘산’ 연작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간결하면서도 수묵화 특유의 기세가 살아 있는 산자락 표현을 보면 지난 30여 년간 쉼 없이 산수화를 그려온 작가의 역량을 체감할 수 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뒤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전국 산하를 다니며 정통 수묵산수화를 그렸어요. 내공은 쌓였지만 동료들과 비슷한 장소에서 그리다 보니 구도를 차별화하기가 어렵더군요. 저만의 작품을 하고 싶어서 10여 년 전 무작정 밤중에 혼자 산에 올라갔어요. 달 아래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우다가 여명이 밝아오는데, 어느 순간 하늘이 보라색이 되고 먼 산자락 끝에 붉은 기운이 돌더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 광경에서 강렬한 감동을 느꼈어요. 그 감동을 그림으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류 작가는 이후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산과 물, 하늘과 달 등 자연물을 다양한 색과 기법으로 표현해 왔다. 이번 전시에 나온 20여 점의 신작 중 대표작은 가로 2.12m, 세로 2.5m의 대작 ‘마음의 달’이다. 거대한 황금빛 달이 검보라빛 하늘에 떠 있고, 먹으로 그린 산자락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을 밝은 보라색으로 칠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국화가 갖고 있는 빈 공간의 멋을 살리되 산의 안쪽에 여백을 둬 동양화와 서양 추상화의 매력을 겸비했다.
‘달빛’과 ‘월하’에서는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표현한 물과 하늘의 서정적인 색조를, ‘달빛메아리’에서는 세 개의 달이 밤을 밝히는 몽환적인 모습을 동양화의 섬세한 필치로 감상할 수 있다.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달무리 표현이 특히 빼어나다. ‘녹색 산’ ‘붉은 산’ ‘초록 산’ ‘푸른 산’ 등 산 연작은 여러 색의 산과 달을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그려낸 그림들이다.
그의 작품은 동양화로 분류되지만 현대적인 감각 덕분에 젊은 세대에게 특히 인기다. 류 작가가 신기술 접목에 적극적인 것도 이런 인기에 한몫했다. 그는 수년 전부터 수묵화 작품에 LED(발광다이오드) 조명과 미디어아트 등 새로운 매체를 접목한 독창적인 작품을 발표해 왔다. 지난해 12월에는 그의 수묵화 ‘월하2021’를 대체불가능토큰(NFT)으로 만든 200점이 경매 시작 10초 만에 모두 팔려 화제를 모았다.
류 작가는 “황금빛 달이 코로나19 등으로 힘든 이들에게 행복과 위안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달 5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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